광해군 중립외교 장단점 - gwanghaegun junglib-oegyo jangdanjeom

​임진왜란 당시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는 일본군을 피해 한양을 떠났던 선조는 당시 스무 살도 되지 않았던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다.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간 아버지 선조와는 달리 광해군은 전쟁 극복을 위해 관군과 의병들을 독려하며 임시 조정이라 할 수 있는 분조 활동을 통해 세자로서의 임무를 다해 백성들과 신하들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은 북인의 지지를 얻어 왕위에 올랐고, 전쟁 복구에 힘을 쏟았다.

광해군 집권 당시 중국에서는 명의 국력이 쇠퇴하고 압록강 북쪽 지역에서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였다.(1616)

후금이 명을 공격하자, 명은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을 내세워 조선에 군사를 요청해 왔다.

광해군 중립외교 장단점 - gwanghaegun junglib-oegyo jangdanjeom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명을 도와 후금을 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과 명은 지는 해고 청은 떠오르는 해니 강성해진 후금과 적이 될 수도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는 측으로 나뉘었다.

광해군은 명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고, 강성해진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없었다.

은혜를 갚는다는 명분과 강한 나라와 맞서지 않는다는 실리 사이에서 광해군이 선택한 것은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는 중립외교였다.

광해군은 일단 명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강홍립에게 약 만여 명의 군사를 주어 명을 돕도록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강홍립에게 후금과 대적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지시했다.

광해군 중립외교 장단점 - gwanghaegun junglib-oegyo jangdanjeom

조선과 명의 연합군은 샤르후에서 후금과 일대 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지휘한 후금은 명의 군대를 물리치고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의 군대마저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미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강홍립은 후금에게 항복하며 조선군이 이곳에 온 것이 어쩔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후금은 조선을 적대시 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명의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속으로는 후금과의 전투를 피하고자 했던 광해군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이렇게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선택한 덕분에 조선은 후금의 침략을 피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 대부분의 신하들은 명을 큰 나라로 여겨야 한다는 사대주의를 주장했다. 

이것은 당시 국제 정세와는 맞지 않는 이야기였는데, 후금이 결국 약화된 명을 대신해 중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힘이 약해진 조선으로서는 새로운 강대국이자 국경을 맞대고 있던 후금과의 외교가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그런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한 사람이 바로 광해군이었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던 조선의 제15대 광해군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다. 때문에 후궁의 아들을 세자로 삼아야 했다.

후궁의 첫째 아들이 임해군, 둘째 아들이 바로 광해군이었다.

그러나 임해군은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에 광해군이 유력한 세자 후보로 떠올랐다.

그런데 선조는 왕비에게서 난 아들을 세자로 삼고 싶었기 때문에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미루고 있었다.

광해군 중립외교 장단점 - gwanghaegun junglib-oegyo jangdanjeom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다급해진 선조는 당시 10대 후반이었던 광해군을 서둘러 세자로 책봉했다.

광해군 중립외교 장단점 - gwanghaegun junglib-oegyo jangdanjeom

광해군은 의주로 피난 간 선조와는 달리 함경도와 강원도 방향으로 나아가 민심을 수습하고 군대와 식량을 모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 관군과 의병들이 일본군을 막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이를 통해 광해군은 신하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선조는 드디어 두 번째 왕비인 인목왕후로부터 기다리던 왕자를 얻게 되는데, 바로 영창대군이었다.

광해군 중립외교 장단점 - gwanghaegun junglib-oegyo jangdanjeom

선조는 영창대군과 광해군을 두고 고민을 했다. 영창대군을 더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창대군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선조가 병으로 사망하고 광해군은 그대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광해군은 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왕비가 낳은 영창대군을 왕으로 만들려는 무리들과 자신의 형인 임해군을 지지하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왕의 자리를 위협받던 광해군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귀양 보낸 후 그곳에서 죽게 만들었다.

광해군 중립외교 장단점 - gwanghaegun junglib-oegyo jangdanjeom

광해군은 이렇게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여 왕권이 확립되자 본격적으로 임진왜란 때문에 황폐해진 조선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먼저 전쟁 중 불에 탄 창덕궁을 중건했으며 공납 제도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대동법은 다양한 품목으로 거두던 공납을 쌀로 대신 내게 하는 제도로, 농민의 부담을 줄여 주고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실시되었다. 이로써 여러 가지 곡물을 쌀로 통일해 바치게 하는 대동법의 실시로 특산물로 세금을 내야했던 문제점을 고치도록 했다.

또한 국가재정을 제대로 확보하기 위해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는 양전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전쟁 이후 질병이 만연해 허준으로 하여금 의서인 <동의보감>을 완성케하여 백성들이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파괴된 성곽을 수리하고 불타버린 사고를 다시 건축하였다.

한편,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의 충신과 열녀 등에 대해 조사하고 추앙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는 성리학적 질서의 강화를 통해 왜란 후 혼란한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 임진왜란 때 활약한 광해군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이처럼 광해군은 밖으로는 중립외교를 통해 전쟁의 위협을 줄이고 안으로는 세금제도 표준화 및 의료 기술의 발달을 지원해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고자 노력한 현명한 왕이었다.

광해군 중립외교 장단점 - gwanghaegun junglib-oegyo jangdanjeom

광해군 중립외교 장단점 - gwanghaegun junglib-oegyo jangdanjeom

광해군 중립외교 장단점 - gwanghaegun junglib-oegyo jangdanjeom

광해군...

역사는 광해군을 조선의 다른 왕들처럼 '조' 나 '종'과 같은 칭호를 붙여 부르지 않는다.

연산군처럼 반정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이었다.

실리적인 중립외교를 펼치며 조선을 재건중이던 광해군은 왜 반정의 희생자가 되었던 것일까?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올렸던 인조반정에 대해 알아보자.

광해군 중립외교 장단점 - gwanghaegun junglib-oegyo jangdanjeom

인조반정은 연산군을 몰아냈던 중종반정에 이어 조선왕조 역사상 두 번째로 일어난 반정이었다.

반정을 일으킨 세력들은 다음을 이유로 내세웠다.

-지금의 왕은 자신의 형제인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인 인목왕후를 폐위하는 등 패륜을 저질렀다.

-임진왜란 때 도와준 은인인 명을 돕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광해군의 정책이 훌륭하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평가하지만, 당시 조선의 신하들은 명을 큰 나라로 섬기는 사대주의가 강했고 후금을 오랑캐 나라로 여기며 무시했다.

광해군 중립외교 장단점 - gwanghaegun junglib-oegyo jangdanjeom

그런데 광해군이 명을 돕지 않은 것도 모자라 오랑캐의 나라 후금을 돕는다고 하니 신하들의 불만이 상당히 컸던 것이다. 

결국 반정을 계획한 이들은 앞선 두 가지 이유를 들며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정권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김자점과 이귀, 심기원 등의 신하들은(서인) 선조의 손자 중 하나인 능양군을 임금의 자리에 올리기로 결정한다.

반란군은 준비가 되자 일제히 궁궐로 쳐들어갔다.

광해군이 반정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대세가 기울어져 피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얼마 가지 못하고 광해군은 반란군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폐위되어 있던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왕후가 능양군을 다음 왕으로 인정하면서 인조반정이 마무리되었다.

결국 능양군이 새롭게 조선의 제16대 인조가 되고, 후금보다 명을 지지하던 세력(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광해군이 추진하던 중립외교는 끝나게 되었다.

때문에 후금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외교적 변화로 훗날 조선은 또다시 두 차례의 큰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조선 역사에서는 반정이 두 번 있었다. 연산군을 몰아냈던 중종반정과 광해군을 몰아냈던 인조반정..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중종반정은 연산군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잘못을 한 폭군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반정이었다면, 인조반정은 정치적인 이념이 달랐기 때문에 벌어진 반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에는 광해군에 대해 폭정으로 쫓겨난 왕이 아니라 국제적인 감각이 있었지만 아쉽게 쫓겨난 왕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e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