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2 줄거리 - miumbad-eul yong-gi2 julgeo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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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 심리학, 인생을 사는 태도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더 이상 추구하려고 하지 않네. 나는 언제까지나 자아를 생각하고, 타인을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할 걸세.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원히 ‘모른다’고 해야겠지.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인생의 온갖 과제에 대해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 하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해서 생각한다.

나의 말과 행동에, 또 나라는 사람에게 상사가 어떤 평가를 내릴지는 상사의 과제이며 내가 컨트롤할 수는 없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상사는 나를 쭉 싫어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타인 또한 당신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에 겁먹지 말고, 타인의 평가에 신경쓰지 말고,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하지 마라. 그저 자신이 믿는 최선의 길을 선택해라.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도 말고, 자신의 과제에 타인을 개입시키지도 마라.

그것이 누구의 과제인가를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

‘지혜’란 학문뿐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지성’도 포함되네. 즉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이 있을 곳을 찾을 수 있는가. ‘나’를 알고 ‘너’를 아는 것. 인간의 본성을 알고 이해하는 것, 아들러는 그것을 ‘인간 이해’라고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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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보는 ‘존경’

‘자네’가 먼저 아이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품게나. 모든 것은 그로부터 시작된다네.

존경이 없는 곳에서 좋은 인간관계는 생길 수 없고, 좋은 인간관계 없이는 자네의 뜻을 전할 수도 없네.

“존경이란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이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이란 그 사람이 그 사람답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다”

눈앞의 타인을 바꾸려고도 조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뭔가 조건을 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인정한다. 이를 넘어서는 존경은 없네. 

그리고 만약 누군가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는다면, 그 사람은 큰 용기를 얻게 되겠지. 존경이란, 이른바 ‘용기 부여’의 출발점이기도 하네.

타인을 조종하려는 태도, 교정하려는 태도에는 절대 존경이 없지.

가령 회사 조직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강한 권력을 가진 독선적 인물이었다고 하세. 분명 직원들은 무슨 지시를 내리든 따르겠지. 고분고분한 기색을 보일 거야. 하지만 그것은 공포가 깔린 복종이지, 거기에 ‘존경’은 추호도 없어. “나를 존경하라”하고 외쳐봤자 아무도 따르지 않네. 점점 마음이 떠날 뿐이지.

자기에 대한 집착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무엇 하나 부정하지 않고, 아무런 강요도 하지 않고, 그 사람이 ‘그 사람답게’ 사는 것을 받아들이고 존중한다. 즉 상대의 존엄을 지켜주면서 관심을 기울인다.

이것은 극히 논리적인 귀결일세. ‘타인의 관심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걸세.

모든 인간관계에 필요한 존경의 구체적인 첫걸음일세. 회사에서의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연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혹은 국제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타인의 관심사’에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네.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귀로 듣고, 타인의 마음으로 느끼는 것’ 이라고.

만약 우리가 같은 마음과 같은 인생이라면

‘만약 내가 이 사람과 같은 마음이고 같은 인생을 산다면 어떨까?’를 생각해보라고.

용기도 존경도 전염이 된다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어도, 동참해주는 사람이 없어도, 

일단은 자네가 횃불에 불을 붙이고 용기를, 존경을 보여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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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변하지 않는 진짜 이유

즉, 우리는 과거의 사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어떤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아무런 관계도 없다.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사는 나라고.

그러면 ‘지금의 나’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려고 할 떄, 그 사람이 과거는 어떤 톤으로 물들게 될까?

답은 하나. 즉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이렇게 되어 다행이다”라고 결론 내리게 되지.

‘지금’을 긍정하기 위해 불행했던 ‘과거’를 긍정한다.

‘이걸로 잘된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과거를 좋은 추억으로 기억한다.

알겠나, 우리의 세계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과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네. 열 명이 있으면, 그 열명 각기 다른 ‘지금’에 의해 채색된 각각의 해석이 있을 뿐이지.

그래. 과거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네.

당신이 ‘지금’이 과거를 결정한다

인간의 누구나 ‘나’라는 이야기의 편찬자이고, 그 과거는 ‘지금의 나’의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유자재로 다시 쓸 수 있네.

인간은 과거에 일어난 방대한 사건 중에 지금의 ‘목적’에 합치되는 사건만을 골라서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으로 삼는다.

과거가 ‘지금’을 정하는 것이 아닐세. 자네의 ‘지금’이 과거를 정하는 것이지.

나쁜 그사람, 불쌍한 나

자네가 아무리 ‘나쁜 그 사람’에 대한 동의를 구하고 ‘불쌍한 나’를 알아달라고 해도, 그리고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일이적인 위로는 될지언정 본질을 해결하지는 못하니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집중하라

우리가 의논해야 할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뿐일세. ‘나쁜 그 사람’ 같은 건 필요 없어. ‘불쌍한 나’도 필요 없고. 자네가 아무리 큰 소리로 떠들어봤자 나는 흘려듣겠지.

설령 내가 ‘나쁜 그 사람’이나 ‘불쌍한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거 참, 힘들었겠군” 혹은 “자넨 아무 잘못도 없어”라고 동조하면 잠깐 마음은 편안해지겠지. 카운슬링 받기를 잘했다, 이 사람에게 털어놓기를 잘했다, 하고 만족할지도 몰라. 그런데, 그래서 내일부터 매일이 어떻게 달라질까? 다시 상처받으면 위안받고 싶어지지 않을까? 결국 그것은 ‘의존’이 아닐까? … 그렇기에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걸세.

‘눈앞에 있는 자네’를 알면 그걸로 충분하고, 원론적으로 나는 ‘과거의 자네’가 어땠는지 알 필요가 없네.

건석적이고 과학적인, 인간에 대한 존경을 토대로 하는 인간 이해의 심리학. 그것이 아들러 심리학이라네.

칭찬하지도 야단치지도 말라

그래 아이들은 종종 이렇게 곤충을 죽이는 잔인함을 보이지. 그런데 정말로 아이는 잔인한 존재일까? 가령 프로이트가 말하는 ‘공격 욕동’같은 것이 숨어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아이들은 잔인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모르는’ 걸세. 생명의 가치도, 타인의 고통도.

철길 위에서 노는 아이들은 그런 행위가 위험하다는 걸 모를 수도 있지.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떠는 아이는 그런 행동이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고. 그 외에 어떤 일이든 우리는 누구나 ‘모른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하네. ‘모른다’는 사실로 심하게 꾸짖다니, 이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나?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질책이 아니라 가르쳐 주는 것이라네. 감정적이 되어서도, 큰 소리를 내어서도 안 되고 이성의 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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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을 받으면 ‘죄’가 없어질까

그 모든 행위는 ‘소속감’, 즉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라는 목적에서 비롯된다네.

그런데 왜 ‘늘’ 야단치는 걸까? 왜 ‘늘’ 화난 표정을 짓고, 늘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나?

아니지. 그거야말로 ‘야단친다’라는 방법이 교육상 전혀 효과가 없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네.

야단을 맞음으로써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증명하려는 걸세.

폭력이란 이름의 커뮤니케이션

‘전달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입구에 불과해. 최종적인 목표는 합의를 이루는 것이라네. 전하기만 해서는 의미가 없어. 전달한 내용을 사람들이 이해하고 일정한 합의를 이룰 때 커뮤니케이션은 비로소 의미를 갖네.

화내는 것과 야단치는 것은 같은 의미다

누군가의 논의를 주고받는 중에 차츰 형세가 불리해 진다. 열세에 몰린다. 혹은 논의를 시작할 때부터 자신의 주장에 합리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할고 있었다. 그럴 때 폭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성을 높이거나 책상을 치거나 눈물을 쥐어짜는 등 상대를 억누르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사람이 있네. 이러한 행동 또한 값싼 ‘폭력적’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네.

분노와 폭력이 수반된 커뮤니케이션에는 존경이란 없어. 오히려 경멸을 초래할 뿐이지. 질책이 본질적인 개선책이 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걸세. 이를 근거로 아들러는 “분노란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는 감정이다”라고 말했네.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눈앞에 있는 ‘바꿀 수 있는 것’을 직시하게나.

“신이여, 바라옵건데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내 인생을 선택하는 것은 바로 나

“인간이 미성년 상태에 있는 이유는 이성이 결여되어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지시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결단도 용기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자기 책임하에 미성년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성을 발휘할 용기를 가져라.”

그러니까 교육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 사람, 그리고 조직의 운영을 맡고 있는 리더는 늘 ‘자립’을 목표로 내세워야 하네.

“그런 건 스스로 결정해도 돼”라고 가르쳐줄 것. 본인의 인생은, 매일의 행동은 전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줄 것. 그리고 결정하는데 필요한 자료 -예를 들면 지식과 경험-가 있으면 제공해줄 것. 그것이 바람직한 교육자의 자세라네.

아이들이 실패했을 때, 분명 자네에게도 책임을 묻겠지. 하지만 거기에 자네 인생을 거는 건 아니잖나. 진정한 의미에서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은 본인뿐이야. 그래서 ‘과제의 분리’라는 발상이 탄생한 것이고. 즉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하는. 결국 자네가 책임질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의 과제에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되지.

칭찬이 경쟁을 낳는다

법을 어기면 엄한 벌을 받고, 법을 지키면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인정을 받는다. 즉 사람들은 리더의 인격과 사상, 신념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칭찬 받는 것’과 ‘야단맞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 리더를 따르는 걸세.

먼저 공동체를 치료하라

시간을 다투는 마라톤과 달리 독재적 리더가 이끄는 공동체에서는 무엇을 ‘승리’로 판단할지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네. 교실이라면 학업 이외의 부분도 판단의 근거가 되지만. 그리고 평가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만큼 친구의 발목을 잡아끌고, 다른 사람의 공을 가로채고, 본인만 인정받으려고 리더에게 알랑거리는 사람들이 날뒤게 되지.

조직은 상벌도 경쟁도 없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관철하지 않으면 안 되네. 상벌을 이용해 사람을 조종하려는 교육은 민주주의에서 가장 멀리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해주게나.

교육자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행동을 일으킨 ‘개인’이 아니라 문제행동이 일어난 ‘공동체’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점이네. 그리고 개인보다는 공동체 자체를 치료해야 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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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불완전’하게 시작된다

인간에게 고립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네. 고립된 인간은 몸의 안전뿐 아니라 마음의 안전까지도 위협받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니까. 때문에 우리는 항상 타인과 강고한 ‘유대’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거라네.

모든 인간에게는 공동체 감각이 내재되어 있고,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지.

인간은 그 신체적 나약함 때문에 공동체를 만들고 협력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인간은 늘 다른 사람과 ‘관계’맺기를 간절히 원한다.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공동체 감각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라는 용기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 욕구를 ‘소속감’이라고 생각하네. 즉 고립되고 싶지 않다. ‘여기에 있어도 좋다’고 실감하기를 바라지.

칭찬받는 것을 통해서만 행복을 실감하는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더 칭찬받기’를 바라네 그 사람은 ‘의존’의 위치에 놓인 채로 영원히 갈구하는 삶을,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삶을 살게 되겠지.

‘나’의 가치를 남들이 정하는 것. 그것은 의존일세. 반면 ‘나’의 가치를 내가 결정하는 것. 이것은 ‘자립’이지. 행복한 삶이 어디에 있는지 답은 명확해지겠지. 자네의 가치를 정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네.

그대로 있으면 되네. ‘특별’한 존재가 아니어도, 특별히 뛰어나지 않아도 자네가 있을 곳은 거기에 있어. 평범한 자신을, ‘그 외 다수’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게.

그리고 ‘평범한 것’은 전혀 부끄러울게 없는 하나의 개성이라네.

‘남과 다른 것’에 가치를 두지 말고 ‘나는 나’라는 것에 가치를 두게나. 그것이 진정한 개성이라네. ‘나는 나’ 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타인과 비교하고 그 ‘차이’에만 주목하려는 것은, 타인을 속이고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삶의 방식이나 다름없네.

자네의 개성이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니까.

그 문제행동은 ‘당신’을 향하고 있다

그 학생이 ‘자네에게 보이는 얼굴’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을 때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를 향해서 그 문제행동을 계속하는 거라네. 부모의 문제가 아닐세. 오로지 자네와 학생 사이에서 일어난 문제지.

왜 인간은 ‘구원자’가 되려고 하는가

‘행복해질 용기’가 없지. 그리고 자네가 교사의 길을 택한 것은 아이들을 구하고 싶어서가 아닐세. 아이들은 구함으로써 자네 스스로를 구하고 싶었던 거지.

타인을 구함으로써 자신을 구하고자 하네. 스스로를 일종의 구원자로 포장해서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려고 하지. 이는 열등감을 떨쳐내지 못한 사람이 종종 빠지는 열등 콤플렉스의 한 형태일세. 일반적으로 ‘메시아 콤플렉스’라고 하네. 메시아, 즉 타인의 구원자가 되려고 하는 심적 도착이라네.

불행한 사람이 누군가를 구하려고 하면, 그것은 자기만족에 그치고 누구 한 사람 행복해지질 않아.

모든 기쁨도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교우의 관계를 통해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귀로 듣고, 타인의 마음으로 느끼는 것을 배운다”

왜 인생의 과제에 ‘일’이 포함되는가

우리 인간은 심심해서 무리를 지어 산 것이 아니야. 인간은 무리 지어 살면서 ‘분업’이라는 획기적인 작업 방식을 손에 넣었네.

우리가 일하고 협력하고 공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과 ‘분업’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믿어야만 하네.

그래. 인간에게 ‘믿지 않는다’라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어. 협력하지 않는다, 분업하지 않는다, 그런건 있을 수 없지. 그 사람이 좋아서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좋든 싫든 협력해야 하는 관계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지.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 한 사람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는 점일세. 즉 순수한 이기심의 조합이 분업을 성립시키지. 이기심을 추구한 결과로 일정한 경제 질서가 생겨. 이것이 아담 스미스가 생각한 분업일세.

“인간의 가치는 공동체에서 할당된 분업의 역할을 어떻게 완수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다시 말해, 인간의 가치는 ‘어떤 일에 종사하느냐’로 정해지는 것이 아닐세. 그 일에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로 정해지는 것이지.

하지만 분업이 시작되고 나서 인물을 평가하거나 어떤 관계가 바람직한지를 따질 때에는 능력만으로 판단하지 않네. 오히려 ‘이 사람과 같이 일하고 싶은가’가 중요해지지. 그렇지 않으면 서로 돕기가 힘들어지니까. 그리고 ‘이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은가’, ‘이 사람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와주고 싶은가’를 경정하는 최대 요인은 그 사람의 성실함이자 일에 임하는 태도라네.

정의로움에 취한 사람은 자기 이외의 가치관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끝내는 ‘정의란 이름으로 개입’에 나서네. 그러한 개입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유를 빼앗긴 회색 빛깔의 획일적인 사회겠지. 자네가 어떤 일을 하든, 다름 사람이 어떤 일을 하든 마음에 둘 필요가 없는 거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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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즉 존경이란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보는 것’ 이며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라고.

타인을 ‘신뢰’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타인을 존경할 수 있느냐 없느냐와 상관있다네.

예를 들어 주변 모든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의 이런 면이 싫어”. “저 사람의 이런 점을 참을 수 없어”라며 비난하는 사람이 있네. 그러고 나서 한탄하지. “아아,나는 운도 없지. 참 인목도 없어.” 그 사람이 정말 인복이 없는 것일까? 아닐세. 절대 아니지. 친구 복이 없는 게 아니라, 그저 친구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 거라네. 다시 말해, 인간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거지.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라고

그러면 어떤 상대라도 “존경”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다네. 그것은 환경이나 대상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네의 결심에 달려 있기 때문이지.

그래. 모든 것은 믿을 수 있는 용기로 환원된다네.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가면을 벗으면 관계가 깨지니까요! 선생님은 ‘미움 받을 용기’인지 뭔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요, 일부러 미움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쓸데없이 부딪치지 않으려고, 관계를 깨트리지 않으려고 우리는 가면을 쓰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회는 돌아가지 않아요.

먼저 ‘믿는다’는 것

믿는다는 것은 뭐든지 무작정 받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네. 그 사람의 사상이나 신조에 대해, 혹은 그 사람이 하는 말에 대해 한번쯤 의심해보는 것. 일단 믿는 것을 보류하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보는 것. 여기까지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중요한 작업일세. 그런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설령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까지 포함해서 그 사람을 그 자체로 믿는 거라네.

진정한 신뢰란 어디까지나 능동적인 작용이라네.

사람과 사람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자신을 좋아해서’ 자기만 바라보는 게 아닐세. 실상은 그와 반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리는 통에 자기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거라네.

예를 들어 싸우고 헤어진 연인을 생각할 때, 한동안은 전 연인의 미운 점만 떠오를 걸세. 그건 자네가 ‘헤어지길 잘했다’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즉 본인의 결정에 미련이 남았다는 증거지. 스스로에게 “헤어지길 잘했다”라고 타이르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으니까. 그런 단계라고 생각하게. 그런데 만약 전 연인의 좋은 면이 떠올랐다면, 그건 더 이상 일부러 싫어할 필요가 없어진, 그 사람에 대한 마음에서 해방된 것을 의미하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일을 통해 인정받는 것은 자네의 ‘기능’이지 ‘자네’가 아니야. 더 뛰어난 ‘기능’을 가진 자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그 쪽으로 몰리겠지. 그것이 시장원리, 경쟁원리라는 걸세. 그 결과, 자네는 언제까지나 경쟁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소속감도 얻지 못하겠지.

타인을 ‘신뢰’히고 교우의 관계를 맺는 것. 그것밖에는 없네. 우리는 일에 헌신하는 것만으로는 행복을 얻지 못하네.

당연히 상대방의 생각 전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타인을 믿는 것. 그것이 신뢰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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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가 인생의 시련이다

먼저 곁에 있는 사람을 신뢰하게. 그 사람과 친구가 되게. 

전쟁을 없애고 싶다면 자신이 먼저 전쟁에서 벗어나야 하네.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신뢰하는 것. 그것뿐일세. 인간에게 시련이나 결단의 순간은 입시나 취직, 결혼 같은 삶의 상징적인 이벤트가 있을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야. 우리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가 시련이고, ‘지금,여기’라는 일상에 큰 결단이 필요하다네. 그 시련을 피해가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어.

천하를 논하기 전에 내 이웃에게 마음을 쓴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의 인간관계에 신경을 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라네.

주어야 받을 수 있다

타인을 무조건 신뢰하고 존경하는 것. 이것은 ‘주는’ 행위라네.

지금 자네는 아무것도 주려 하지 않고 ‘받는’것만 바라고 있어. 마치 구걸하는 사람처럼. 그건 금전적으로 가난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가난해서 그런거라네.

우리는 마음을 넉넉히 가지고 그 모와놓은 것을 타인에게 줘야 한다네. 타인이 존경해주기를 기다리지말고, 내가 먼저 존경하고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되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네.

주어야 받을 수 있다. ‘받는’ 것만을 기다려서는 안된다. 마음을 구걸해서는 안 된다. .. 이것은 ‘일’과 ‘교우’에 이어, 인간관계를 생각하는 데 아주 중요한 또하나의 관점이라네.

사랑은 ‘빠지는’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앞에 두고 피도 안 통하는 일반론을 시종 떠들고 있어. 그 결과,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의 대부분은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지.

이를테면, 너무 숭고하게 여긴 나머지 상대를 신격화하는 사랑. 아니면 반대로 성적 욕망에 사로잡힌 동물적인 사랑. 심지어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남기려고 하는 생물학적 사랑. 대략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은 이 중 하나를 중심으로 한 것이지.

관념적인 ‘신의 사랑’이나 본능적인 ‘동물의 사랑’에 대해서만 떠들고 누구 하나 ‘인간의 사랑’을 말하려 하지 않으니까.

다시말해, 인간에게 사랑이란 운명에 의해 정해지는 것도 자연 발생적인 것도 아니네.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것이 아니란 말이지.

쌓아올리는 것일세. ‘빠지기’만 하는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네. 그런 건 인생의 과제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없어. ‘의지력’을 발판 삼아 아무것도 없는 곳에 쌓아올려야 하기 때문에 사랑의 과제가 어렵고 힘든 것이라네. 

많은 사람이 이러한 원칙을 모른채 사랑을 말하려 한다네. 그러다 보니 인간이 실제로 관계를 맺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운명’이니 동물적인 ‘본능’이니 하는 말에 기댈 수밖에 없는 걸세.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임에도 의지나 노력의 테두리 밖에 있는 것이라 여기고 직시하지 않네. 쉽게말해 ‘사랑하는 것’을 하려고 않지.

우리는 신도 동물도 아닌 ‘인간의 사랑’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네.

‘사랑받는 기술’에서 ‘사랑하는 기술’로

아들러가 일관되게 설파한 것은 능동적인 사랑의 기술, 즉 ‘타인을 사랑하는 기술’이었네.

확실히 타인한테 사랑받기는 어렵지. 하지만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그 몇배나 어려운 과제라네.

사랑이란 ‘두 사람이 달성하는 과제’다

즉 사랑이란 ‘두 사람이 달성하는 과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기술’은 배우지 않는다.

미움받을 용기2 줄거리 - miumbad-eul yong-gi2 julgeoli

인생의 ‘주어’를 바꾸라 

비록 눈앞에서 기뻐해주는 사람이 있어도 그것이 ‘진심’인지는 원칙적으로 알 수는 없어. 그래서 나온 것이 공헌감이라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라는 주관적인 느낌이 든다면, 즉 공헌감이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더 이상 근거를 찾을 필요가 없다. 공헌감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자. 공헌감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자. 우리는 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음을 실감하네. 우리는 교우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음을 실감하지. 그렇다면 행복은 거기에 있는 거라네.

오로지 믿고 오로지 주는 이타적 태도를 통해서만 교우의 관계가 생긴다네.

즉 우리는 ‘나의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분업의 관계를 맺고, ‘너의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교우의 관계를 맺는다네.

나눌 수 없는 ‘우리의 행복’을 쌓아올리는 것. 그것이 사랑이네.

‘나’와 ‘너’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 ‘우리’라네. 인생의 모든 선택에 있어서 이 순서는 꼭 지켜진다네. ‘나’의 행복을 우선하지 않고, ‘너’의 행복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 두 사람이 행복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두 사람이 달성하는 과제’란 그런 걸세

우리는 태어나서 줄곧 ‘나’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나’의 귀로 소리를 듣고, ‘나’의 행복을 바라며 인생을 걸어가네.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깨달았을 때, ‘나’였던 인생의 주어는 ‘우리’로 변하네. 이기심도 아니고 이타심도 아닌 전혀 새로운 지침 아래 다시 태어나는 것이지.

자립이란 ‘나’로부터 벗어나는 것

‘나약함’이란 인간관계에서 엄청나게 강력한 무기가 되네.

자립이란 ‘자기중심성으로부터의 탈피’라네

우리는 완미한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서 ‘세계의 중심’으로 살아온 것을 그만두어야 하네. ‘나’로부터 탈피해야 하네. 응석부리던 어린 시절의 생활양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한단 말일세. 

사랑은 ‘나’였던 인생의 주어를 ‘우리’로 바꿔주지. 우리는 사랑을 함으로써 ‘나’로부터 해방되어 자립을 이루고,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네.

사랑을 알고 나서 인생의 주어가 ‘우리’로 변하는 것. 이는 인생의 새로운 출발일세. 단 두 사람으로 시작된 ‘우리’는 머지않아 공동체 전체로 그리고 인류 전체로까지 그 범위를 확대해가겠지.

그 사랑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자립이란 경제상의 문제도, 취업상의 문제도 아닐세. 인생에 대한 태도, 생활양식의 문제라네. .. 자네도 누군가를 사랑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이 오겠지. 그때가 바로 어린 시절의 생활양식과 결별하고 진정한 자립을 이룰 때라네. 우리는 타인을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어른이 되니까.

그래 사랑은 진정한 자립이네. 어른이 되는 거지. 그래서 사랑이 힘든 거라네.

왜 사랑받기만을 원하는가

먼저 나서서 사랑하는 수밖에 없어. 사랑하는 것. 사랑받기를 기다리지 말고, 운명을 기다리지 말고, 나의 의사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네. 

인간은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 없이 행동에 나서도, 이쪽이 사랑을 하면 사랑을 받는 상대의 마음에도 사랑이 싹트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이다”라고. 예를 들면 상대의 호의를 무심코 눈치챈 순간, 그 사람이 신경 쓰이고 차츰 좋아지게 되네. 흔한 일 아닌가?

이는 비록 이쪽의 착각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사랑받는다는 보증’이 확보된 상태라네. “그 사람은 나를 좋아하는 게 분명해”, “내 호의를 거절하지는 않을거야”라는 보장 같은 걸 느끼네. 이 보장을 바탕으로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지.

한편 프론이 말하는 ‘사랑한다는 것’에는 이러한 보장이 전혀 없네. 상대가 이쪽을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이, 그냥 사랑하는 것이라네. 사랑에 몸을 던지는 거지.

자네는 아직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 존경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지. 그래서 사랑의 관계에서 ‘성처받을게 빤해’, ‘틀림없이 비참한 기분을 느낄 거야’라고 단정하는 거라네. 그런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면서.

과제를 분리하게. 사랑하는 것은 자네의 과제야. 상대가 그 사랑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는 타인의 과제라네. 자네가 제어할 수 없지. 자네가 할 수 있는 것은 과제를 분리하고, 자신이 먼저 사랑하는 것. 그것뿐일세.

결국 자네는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해줄까?’ 하는 것만 보고 있네. 상대를 보는 듯하지만 나만 보고 있는 거지. 그런 태도로 기다리는 자네를 누가 사랑해주겠나?… 만약 그런 자기중심적 욕구에 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부모뿐이겠지. 부모의 사랑, 특히 어머니에 사랑에는 조건이 없으니까.

운명의 상대란 없다

‘사랑할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운명적인 상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요! 연애에 있어 최대의 난국은 ‘만남’이니까요!

왜 많은 사람이 ‘운명의 상대’를 찾는 것일까? 왜 결혼 상대에게 낭만적인 환상을 품는 거지? 그 이유에 대해 아들러는 “모든 후보자를 배제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네.

그 의미 없는 ‘만남’을 특별한 ‘관계’로 발전시키려면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하네. 말을 걸든 편지를 보내든.

그런데 ‘관계’를 맺을 용기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 ‘운명의 사람’이라는 환상에 매달린다네… 지금 자네가 그러는 것처럼. 눈 앞에 사랑할 누군가가 있음에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이 사람은 안돼”라고 거부하고 “더 이상적이고 더 완벽하고 더 운명적인 상대가 있을 거야”라고 시선을 떨구지. 그 이상의 관계에 발을 들이려 하지 않고 모든 후보자를 나의 손으로 제외하는 거라네.

그렇게 지나치다 싶을, 있지도 않은 이상형을 들먹이면서 살아 있는 인간과 관계 맺는 걸 회피하네. 그것이 “만날 사람이 없다”라고 한탄하는 사람의 정체라고 생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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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결단’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결심이고 결단이고 약속이다.” 만남의 형태는 아무래도 좋네. 진정한 사랑을 맺기로 결심하고, ‘두 사람이 달성하는 과제’와 마주 할 수 있다면 어떤 상대와도 사랑할 수 있어.

운명이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우리는 운명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네. 운명의 주인이어야 하지. 운명의 상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네.

자네는 지금 인생이라는 무도회장의 벽 앞에 서서, 그저 춤추는 사람들을 보고만 있네. “이런 나와 춤을 출 사람이 있을 리 없어”라고 단정 짓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운명의 상대’가 손을 내밀어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 더 이상 비참한 기분을 느끼지 않도록, 나를 싫어하지 않도록,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보호하면서. …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하나겠지. 곁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고 온 힘을 다해 춤을 추게 운명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네. 

생활양식을 다시 선택하라

연애의 과실만을 탐하고, 꽃에 물 주는 것도 잊고 씨도 뿌리지 않았지. 그것이야말로 찰나적인, 향락적인 사랑이라네.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네. ‘사랑한다’는 것을 몰랐던 걸세. 만약 알았더라면 자네는 그 여성과 운명의 관계를 맺을 수도 있었겠지.

에리히 프롬은 말했네. “사랑이란 신념의 행위이며, 신념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도 없다”라고… 아들러라면 이 ‘신념’을 ‘용기’라고 바꿔 말했겠지. 

자네는 용기가 없었네. 그래서 사랑에 주저한 것이고. 사랑할 용기가 없어서 어린 시절에 형성한 사랑받는 생활양식에 머물러 있던 거야. 그뿐일세.

사랑밖에 없네. ‘편하고 싶다’, ‘편해지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은 잠깐의 쾌락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행복은 얻을 수 없네.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때만 자기중심성에서 해방될 수 있지. 오직 타인을 사랑할 때만 자립할 수 있다네. 그리고 타인을 사랑할 때만 공동체 감각에 도달하네. 

“사랑하고 자립하고 인생을 선택하라”

단순하게 산다는 것

세계는 단순하고 인생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계속 단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라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하루’가 시련이기 때문이지.

시간은 흐르네. 새로운 기술이 탄생하고, 새로운 관계가 탄생하고, 새로운 고민이 탄생하지.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갈 친구들에게

기억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는 것을. 그리고 시간이 유한한 이상 모든 인간관계는 ‘이별’을 전제로 성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허무주의에 입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우리는 헤어지기 위해서 만나는 거라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겠지. 모든 만남과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오직 ‘최선의 이별’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뿐이네.

언젠가 헤어지는 날이 왔을 때 “이 사람과 만나서 함께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라고 납득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걸세.

사랑을 시작하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최선의 이별’을 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게. 기한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답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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