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불꽃 결말 - deulama bulkkoch gyeolmal

나는 한국드라마 참 싫어하는 편이다. 누가 누구의 딸이었네, 누가 누구의 아들이었네, 알고보니 형제관계였네, 누가 누구의 엄마였네 아빠였네 라던가 재벌2세와 평범한 여자사이의 흔한 신데렐라 설정..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몇 십년 전과 전혀 달라지지않은, 아니 전혀 시대적 발전을 이루지 못한 뻔하고 진부한 스토리라인이 배경과 배우들만 달라졌을 뿐 여전하기 때문이다.

아니 뻔한 얘기라도 현실적이기라도 하던가, 전혀 개연성없이 현실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만 주구장창 늘어놓다가 결국 a.다들 행복하게 잘 살았대요 하는 해피엔딩 혹은 b.엉망진창 스토리의 원흉을 제거하면서 끝나는 새드엔딩 둘 중 하나로 결말짓고 만다.

김수현 작가 드라마라도 별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 희대의 명작 청춘의 덫을 겨우 초등학교 다니던 그 어린나이에도 감탄하면서 봤고, 지금 다시봐도 감탄하고 있지만, 현실성 없고 뻔한 시나리오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그런데, 청춘의 덫 후속작인 불꽃을 보고는 "오.." "흠.." "흐..음?" 이런 반응이었달까. 내가 예상했던 내 스스로의 반응과는 조금 달랐다. 여기에서도 똑같이 재벌가 등장하고, 의사집안 등장하고, 교외지역 사슴농장이라고는 하나 어찌돼었든 빚지는 일 없이 자기식구 먹고 사는 평범한 중산층 집안 등장하는등 다른 드라마와 비슷한 배경 설정이지만, 인물들이 사귀다가 결혼하고 헤어지는 과정,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집안내, 고부간, 형제간, 친구사이의 갈등이 굉장히 현실적으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이라는 어감이 딱 들어맞지 않는다면 최소한 "진실"되기라도 했다. 

이 드라마 속 네 남녀주인공이 모두 맘에든 건 아니었다. 각 인물마다 매력점이 있고, 그 매력을 까먹는 점도 있다. 어떤 인물은 엄청 큰 단점이 장점을 다 잡아먹기도 하고, 어떤 인물은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아주 큰 장점이 그 단점들을 커버해주기도 한다. 그런 것 또한 현실적이리라. 

이영애, 차인표, 이경영, 조민수 이 네 인물 중 극 후반으로 갈수록 가장 많은 변화를 보이는 인물이라면 아마 차인표가 아닌가 싶다. 차인표가 연기한 차종혁은 그의 성격답게 극 초반에는 냉정하고, 잠잠하고, 주도면밀하게 상황을 이끌어 가나, 극 후반에서 아내인 박지현(이영애)의 이혼요구를 기점으로 가련하고 처참하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강했던 사나이가 무너질 때, 나는 그런 순간을 좋아한다. 특히 문학작품이라면 더더욱 평점심을 유지하던 사람이 흐트러지는 순간, 그런 순간을 발견할 때면 나도 모르게 '그렇지, 이래야 사람이지' 하는 기분이 든다. 그런 점에서 불꽃 27화 중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 숨어있던 부인 박지현을 수소문해 결국 찾아내고, 그녀의 그간 심경고백을 다 들은 뒤 여전히 이혼만을 요구하는 지현에게 나지막히 흐느끼며 한 종혁의 대사가 참 가슴아팠다.

"길게 잡아서 한 달만 아무일 없는듯이 같이있자. 그럼..원하는대로.. 해줄께... 그것도 못해주겠니? 너 여기 놔두고 내가 혼자 갈 것 같아?"

종혁은 지현의 오피스텔 침대에 눕고 잠을 청한다. 지현은 어두운 창밖 거리의 불빛과 차들이 지나가는 도로는 바라본다.

뒤척이는 종혁을 잠시 쳐다보다 이불을 덮어주려할 때 등돌아 있던 종혁이 손을 뻗어 이불을 끌어당기던 지현의 손을 붙잡는다.

그리고는 조금있다 지현의 손을 놓는다.

백마 탄 왕자와 결혼한 신데렐라는 과연 행복했을까? 어린이 동화 <신데렐라>나 비교적 가벼운 성향의 감각적 트렌디 드라마에서는 결말에 '그리하여 그 둘은 역경을 딛고 다시 재회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느낌으로 끝나지만, 현실의 신데렐라는 그렇지 않다.

2000년도에 방영된 김수현 드라마 <불꽃>에서는 평범한 집안의 여주인공이 '바람직한 기럭지에 훈훈한 외모의 재벌 2세 남자'와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게 되지만, 드라마 속에서 보여준 '신데렐라 결혼, 그 이후의 생활'은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게 그려졌다. 오히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데렐라, 그 딴 게 뭐 별거임~? 맘 편하게 사는 게 최고인 것을- 여주인공이여, 그 왕자 집에서 당장 탈출하라~'를 외치고 싶게 만드는 그런 스토리.. 사실, 현실이 그러하기도 하고 말이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드라마 <불꽃>의 여주인공 지현(이영애)은 서울 변두리 지역 평범한 집안의 딸로, 미모의 드라마 작가이다. 여자의 미모도 하나의 경쟁력이 되는 사회 구조 속에서 탁월한 미모의 여주인공은 대번에 재벌 2세남 종혁(차인표)에게 찜 당하게 되고, 별로 마음으로 내키지는 않지만 남자의 적극적인 구애에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허나 여주인공은 여행지 파타야에서 만난 남자 강욱(이경영)에게서 불꽃 튀는 사랑을 경험하게 되고..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겠지만, 둘 다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라 그들의 짧은 사랑은 반 불륜(아직 결혼은 안했으므로)이나 단순 스캔들에 그치고 만다. 지현과 강욱은 서로 강렬하게 삘이 통했으나 각각 적극적으로 구애해 오는 상대남(차인표), 상대녀(조민수)가 있는 데다 주변의 여러 방해 요소로 결국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고 각자 다른 상대랑 결혼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이 드라마의 피크- 첫 미니 주연작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도 재벌남이었던 차인표는 거기에선 '나른하고, 신사적이고, 왠지 모르게 여자들의 모성을 자극하기도 하는 달달 왕자의 이미지'가 강했었는데, 드라마 <불꽃>에서는 재벌남이기는 하되 '시도 때도 없이 상대 여자를 들들 볶는 다소 예민하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스타일의 왕자'로 나온다.

물론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몰라서, 극 중 지현(이영애)의 주변인들은 저런 완벽한 남자(종혁-차인표)를 놔두고 그녀가 왜 표면적으로는 그보다 못해 보이는 남자(강욱-이경영)에게 목 매다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극 중 지현(이영애)의 이상형은 푸근한 스타일의 아빠(지현부-백일섭) 같은 남자였던 것- 크게 부자는 아니더라도 지현의 아버지가 평소에 그녀의 엄마에게 너무나도 자상하게 잘 대해주었고, 그런 식으로 '서로 아껴주고 위해주며 사는 것' & '그런 가정, 그런 남편, 그런 아버지상'이 지현에게는 이상적으로 비춰졌기에 자신도 그런 따뜻한 성향의 남자와 만나 가정을 꾸려가길 원했다.

그러나 남자 쪽의 적극적인 구애와 주변의 등 떠밀림에 의해 선택하게 된 종혁(차인표)은 표면적으로는 완벽한 모든 조건을 다 갖췄지만, 평소에 지현이 그려왔던 '자상한 남자 & 푸근한 남편' 이미지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매사에 사람 긴장하게 만들고,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따라주길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마초적인 기질이 강한 남자'였던 것-

그 둘은 성격 궁합도 상당히 안 좋은 편인데.. 글 쓰는 직업을 업으로 삼아온 여주인공 지현은 그녀 자체도 성격이 꽤나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편이고 원래 '성격이 예민한 사람'은 다소 '무디고 푸근한 성향의 상대'를 만나야 잘 살 수 있는데, 이 쪽은 여자 쪽(지현)도 예민한 성격인데 남자 쪽(종혁)마저 만만찮게 까탈스럽고 예민한 편이라 성격 상으로 완전 상극인 궁합이다. 그래서 사귀면서도 시시때때로 의견이 안 맞아서 서로 날을 세우며 격렬하게 싸워댄다.

하지만 극 중 종혁(차인표)의 지현(이영애)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어서 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지극 정성을 다하고.. 진심은 언젠간 통한다고, 지현도 어차피 진짜 사랑하는 남자와는 안될 거(강욱 상대녀 집안에서 그 둘을 떼어놓기 위해 워낙에 완강하게 나왔으므로) 나름 종혁에게 마음 붙여보려고 노력하고 '에라, 모르겠다~ 재벌 2세와 요란뻑쩍지근한 결혼이나 해 보자..' 이런 심정으로 남들 다 부러워하는 백마 탄 왕자와 결혼에 골인하게 되는데... 거기서 이 신데렐라녀의 인생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모드가 아니라 '행복 끝, 불행 시작~'의 인생이 펼쳐지게 된다.

나름 뼈대 있는 것까진 좋은데, 지현이 시집 간 이 재벌집은 '집안의 지엄한 법도를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숨막히는 가정'으로 이 집 며느리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아침을 맞아야 하고, 시아버지(박근형) 식사하실 때 옆에서 일렬 종대로 서서 보좌해야 하며, 아무리 피곤해도 서방님 귀가하실 때까지 깨어있다가 마중 나가야 하며, 시부모님(박근형-강부자) 말씀은 법으로 떠받들며 찍 소리 않고 살아가야 하는 등.. 나름 자기 세계 안에서 독립적이기를 원하는 지현(이영애)의 입장에선 쥐약 같은 결혼 생활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여주인공 지현은 '남들이 다 선망하는 왕자=바람직한 기럭지에 훈훈한 외모의 능력 있는 재벌남'에게 신데델라처럼 시집 가서 고상하게 우아 떨며 행복하게 사는 게 아니라, 날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 재벌가에서의 생활에 갈수록 적응되어 가는 게 아닌.. 나날이 더욱 더 지쳐 가면서, 극도의 스트레스로 두 번의 유산까지 경험하게 되고...

그래서 남편한테도 '이 결혼 잘못한 것 같다~'고 하소연하고.. 평범한 집안의 맞벌이 부부들이 수시로 여자 쪽 친정집에 드나드는 것과는 달리,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 시부모님의 허락이 떨어져야 겨우 한 번 궁궐에서 출궁하듯 드나들 수 있는 친정집에 가서 엄마 품에 안겨 펑펑 울고... 하여튼 그래서 결혼은 비슷한 집안끼리 해야 된다는 그런 말이 있나 보다.

이 드라마의 결말부 내용은.. 결국 소설 <인형의 집>에서 여주인공이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 살아가기 위해 집을 뛰쳐 나오듯, 드라마 <불꽃>의 여주인공 지현(이영애)은 '신데렐라~? 그 딴 건 지나가는 개나 줘버려..! 돈이고, 재벌집이고 다 필요 없어~' 하고, 그 재벌집을 뛰쳐 나오게 된다. 진정한 의미의 프리즌 브레이크-

'여자의 마음을 잘 다독여 주지는 못했어도 끝까지 지현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종혁(차인표)의 입장'에선 좀 안된 일이긴 하지만, 보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 재벌집에 여주인공 지현(이영애)을 계속 내버려 뒀다간 사람 잡겠다 싶어서.. 이혼하길 잘했고, 그 집을 잘 뛰쳐나왔다 싶었더랬다.

옛날 한국 TV 드라마는 나름 보수적인 구석이 있어서 좀 위험 수위가 높은 결말이나 멀쩡한 가정을 갈라놓는 결말은 되도록 피하는 편이었는데 언젠가부터는 방송가의 인식도 바뀌어서인지, 점점 그런 보수성에서 탈피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전자의 예 : 예전에 M사에서 한 <호텔>이란 드라마(한석규, 이승연, 이진우 주연)에서.. 둘이 충분히 이어줘도 되는 결말이었는데, 동생과 약혼했던 여자와 그 형과의 결합이 모양새가 좀 안좋다고 여겼던지 결말에 갑작스럽게 남자 주인공을 죽였던 사례가 생각 남 *

드라마 <불꽃>의 결말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르게 흘러갔다. 이혼한 지현(이영애)의 경우는 그렇다 쳐도, 강욱(이경영) 쪽은 부인(조민수)과의 사이에서 딸까지 낳았는데 설마 이혼할까 싶었다. 그래서 결국 '사랑하는 두 남녀(강욱-지현)'가 이뤄지지는 못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지현과 강욱 둘 다 이혼하고 최종회 마지막 장면이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연락이 닿은 그 둘이 서로가 있는 장소의 중간 지점에('서울-대전-대구'에서의 대전 쯤 되는 것 같음) 서로 격렬하게 차를 몰고 와 다시 만나게 되는 것>으로 결말 지어졌다. 달리는 내내 전화 통화로 '다시는 서로를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불꽃은 불꽃인데, '금방 사라져 버리는 불꽃'이 아니라 '쉽게 꺼지지 않는 불꽃'이었나 보다. 김수현 작가가 비교적 여러 세대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가족 드라마를 많이 썼고 며느리가 시집살이 하는 내용을 많이 써서 은근히 가부장적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이런 면에서 보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92년에 방영된 <사랑이 뭐길래> 같은 드라마만 봐도.. 남자 쪽 대발이네 집은 상당히 가부장적이었지만, 여자 쪽 집안은 여권이 높은 굉장히 민주적인 집안이었던 게 생각이 난다. 

그 때 당시.. 보통의 한국 가정은 딸 여럿에 아들 하나면 아들만 귀하게 여기는 집안이 많았는데 <사랑이 뭐길래>에서의 여주인공 집안은 두 딸 중에 공부 잘하는 똑똑한 큰 딸(하희라)이 가장 대접 받고, 평범한 외아들인 남동생(김찬우)은 각종 잡다한 심부름(콩나물, 두부 심부름 등)을 다 하고 아빠 보다는 엄마 입김이 더 센 집안으로 그려진 바 있다. 그런 걸 보면, 김수현 작가의 세계관이 그렇게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기만 한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거나 드라마 <불꽃>의 결말은 그 때(2000년) 당시엔, 내 예상과는 달리 '좀 색다르고 파격적인 결말'이란 생각이 들었었다.

평범한 집안의 여주인공이 잘생긴 재벌 2세와 결혼해서 신데렐라가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후 '신데렐라의 결혼 생활'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인지 '여주인공이 그 집에서 탈출하고, 크게 부자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진정 원하는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자신의 일과 사랑을 찾아 나가는 모습'이 나름 통쾌하고 시원스럽게 느껴졌다. 

전에 누가 그랬던 것처럼 '남자 잘 만나서 신분 상승을 이루는 것'은 꼭 남의 손으로 밑 닦은 것처럼 찜찜하다. 또 세상에 공짜는 없기에.. 사람은 누구나 남의 인생에 묻어가기 보다는 자기 노력으로 뭔가를 이루었을 때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걸 이 드라마에서 지현이란 인물이 보여주었던 게 아니었을지..? '신데렐라, 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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