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조선 거주 일본인 - haebang hu joseon geoju ilbon-in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에 광복을 맞았다.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미국에 원자폭탄 두방을 맞고 무조건항복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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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원폭투하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 할 수 없었고 카이로선언에서 일본의 식민지는 모두 해방되어야 하고

특히 “한국 민중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를 거쳐 자유와 독립을 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또한 연합국의 정상들은 포츠담 회담을 통해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의 네 섬과 연합국이 인정하는 작은 섬에 한정된다.”고 못 박았다.

그렇다면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었다.

▶히로히토 덴노의 옥음방송으로 일본의 패전이 알려진 직후, 부산지방교통국장 다나베 다몬에게 특이한 지시가 내려왔다. 그 내용인즉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 부부 일행이 탈 선박을 급히 구하라는 것이었다. 이틀 후 이 선박은 부산 앞바다를 출발했는데 얼마 못 가서 갑자기 목도 앞바다에서 멈춰선 후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아베 부부가 조선에서 약탈한 귀중품이 너무 많았던 나머지 낡은 배가 감당을 못하고 침몰 직전으로 갔던 것이었다. 결국 짐을 절반 정도 바다에 버리고 난 후에야 간신히 부산으로 돌아와 쉬쉬하며 경성으로 몰래 잡입했다고 한다.

일본이 패전을 선언하면서 한국이 해방되자, 조선총독부는 총독령으로 각 기관에 달려있던 덴노의 사진과 조선 각 지역의 일본 신사에 설치된 위패들을 모두 소각할 것을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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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조선신궁

만주 작전의 성공으로 소련군이 한반도 이북지역으로 입성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만주와 이북 주재 일본군 수뇌부는, 자신들과 군인 가족들을 즉시로 대피시키고는 나머지 100만 명의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피방송도 내보내지 않았다. 아울러 이전에 각 기관 수장들과 조선주재 일본 대기업 간부들은 이미 탈출했다. 이 결과로 졸지에 소련군이 이북에 입성하는 모습을 본 일본인들은 경악하고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가 자신들을 적군의 손에 내팽겨쳤다는 사실에 분노했으며, 일부는 노동력이라는 이유로 소련으로 끌려가거나 재산을 모두 몰수당한 채 빈손으로 이남으로 내려오기도 했다고. 내려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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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시키는 하는 소련군 장교

일제강점기 시절 함경남도 원산에서 중학교를 다녔던 일본인 카사이 히사요시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원산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사는 원산부와 한국인 거주지역이던 원산리로 분리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일본인 거주지역에는 모든 공공시설과 심지어 치안시설까지 배치되어, 일본인들의 거주에 불편함이 없었다고 한다. 물론 한국인들이 원산부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기에, 원산부와 원산리는 지금의 남한과 북한 같은 괴리감을 가진 지역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해방 당시 자신의 거주지역에 많은 한국인들이 나와 만세를 부르는 것에 "이렇게 많은 조선인이 있다니!!!" 하면서 놀랐다고. 그곳이 본래 한국인들의 땅이란 사실 자체를 인식 못했다는 뜻이다.

해방이 되고 나서 많은 폭력사태가 일어났다고 한다. 피해자는 대부분 일본제국 경찰과 교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이하게도 일본인들보다는 한국인들의 피해가 컸다고. 알고 보니 해방을 맞이하고 나서 사람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 형사들과 교사들로 일했던 한국인들에게 가한 것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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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인천상륙작전 中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은 하루빨리 고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분주했는데, 은행에서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빼가고 자신들이 모아둔 재산들 모두를 갖고 가기 위해 필사적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짐이 많았는지 감당을 할 수가 없어 비틀거리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그러나 한국인들이 "그 재산들은 모두 우리를 착취해 이룩한 거니까 함부로 못 가져간다! 가지고 가려거든 날 죽이고 가져가라!!"며 반발하자 미군정에서 이를 수용, 반출할 수 있는 개인 재산과 현금 반출액을 제한했다고 한다. 거기에다 전쟁 당시 많은 일본의 선박들이 파괴된 까닭에 배편도 별로 없었고, 당장 입국하게 되면 여러 가지 검사나 조사로 그나마 가지고 간 재산이 더욱 줄어들게 되니, 상당수의 귀환 일본인들이 밀수선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 밀수선은 비싸고 위험한 데다 믿을 수 없었다. 심지어 이들을 노리는 해적까지 횡행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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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거주 일본인들이 단출한 짐을 들고 귀국길에 올랐다.

문화통치 당시에 이주해서 한반도에서 산 일본인 부모들에게서 한반도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일본으로 귀환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 일본제국 경찰관은 충청도에서 출생했는데 광복이 되어 자신의 가족들이 일본으로 귀환하게 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반도 출신 일본인들은 조선을 합병한 영토가 아닌 원래 일본 본토의 일부로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다. 조선이 독립된 나라였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누구에게서도 '여기는 우리가 부당하게 침략해서 빼앗은 곳'이라고 알려주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채로, 태어날 때부터 그때까지 평생을 여기도 일본 땅이라고 교육받으며 그런 줄로만 알고 살아왔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한반도의 일본인들은 실직하거나 권력에서 밀려났고, 생계를 위해 궂은 일을 하거나 세간살이를 헐값에 파는 등 생활이 악화 일변도였다. 그러나 일부 한반도 거주 일본인들은 대공습으로 폐허가 된데다 기반도 없는 본토로 돌아가는 것을 꺼렸다. 그래도 한반도의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는 것을 느끼자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으로서 계속 잔류하기로 마음먹었다. YMCA에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개최한 한국어 수업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희망자들이 정원을 초과, 학급을 하나 더 늘렸을 정도. 하지만 사회혼란 속에서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이 격화되고, 미군정의 일괄송환 방침이 확정되자 이들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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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YMCA 한국어강좌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남긴 상당수의 재산들을 사서 모으는 한국인들도 있었는데, 생활터전을 잡기 시작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한국인들도 생기기 시작했다고. 왜노라고 경멸하면서도 일본인들과 장사를 하기 위해 일본어로 호객행위를 하는 이중성을 나타내는 일부 한국인들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도 있었다.

패전과 해방이라는 상황을 동시에 당한 일본인들은 순식간에 뒤바뀐 갑을관계의 현실을 체감해야 했다. 이 중 어떤 일본인 여교사는 갑작스레 자신이 가르치던 한국인 학생의 집에 식모로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자기 자녀의 선생이라는 것 때문에 그 학생의 학부모는 그녀에게 많은 신경을 써줬는데, 그때마다 그녀의 마음이 괴로웠다고 한다.

일본으로 귀환한 귀환 일본인들의 생활 역시 피폐하긴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일본의 상황도 상황인지라 거의 잉여 취급이었다고 한다. 귀환한 일본인들은 생활터전을 잡기까지는 수용소 생활을 했는데, 일본 내 사정 역시 현시창이다 보니 아예 수용소를 영구거처로 삼는 귀환 일본인들이 있었다고. 여기에 본토 일본인들 역시 자신들의 생활도 힘든 판에 먹여야 할 입이 더 생긴 것에 대해 불쾌해 했다고 한다. 심지어 전염병이 돌자 이를 옮기는 주범급으로 간주하는 듯한 사회분위기 역시 우호적이지 못했다. 아예 본국인들이 "너희는 식민지에서 그렇게 수탈하고 착취해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천벌받는 거야!!"라는 말을 하는 까닭에 그 괴로움이 더했다고 한다.

이렇게 한반도에 살던 일본인들은 크고 작은 고초를 겪었지만, 그래도 38선 이남의 일본인들은 그나마 처지가 나았다. 이북의 일본인들은 소련군의 현지조달에다가 반일 감정도 남한 지역보다 심해서 잔류는커녕 하루빨리 남하하여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이루었다. 몸만 빠져나오면 다행이었고, 소련군의 강간이 무서워서 대부분의 일본 여성들은 머리를 빡빡 깎거나 숯을 얼굴에 문질렀다. 이 사람들의 행색은 귀환한 뒤에도 일본에서 한동안 이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을 괴롭히거나 괴롭혔다고 여겨진 일본제국 경찰 출신 일본인들도 상당수 살해되었는데, 이는 남한 지역보다 훨씬 더 심했다고 한다.

해방 직후 일본인의 눈으로 본 소련군과 미군의 모습 비교도 인상적이다. 당시 소련군은 전투 부대가 선두로 남하해왔기 때문에 몰골이 상당히 꾀죄죄했고, 무기와 탄약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지조달했다. 일본인이 키우던 개가 지나가던 소련군에게 총 맞아 죽은 뒤 보신탕 신세가 되어버리거나, 소련 여군들이 몰려와 옷가지와 이불을 전부 챙겨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심지어 소련군을 환영하던 조선인 자치위원회도 그들의 약탈을 주의하라고 사이렌을 울릴 정도. 조선인들도 일본인 정도는 아니지만 물품을 강탈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에 비해 강원도 춘천 지역에서는 소련군이 주둔하다 철수하고 미군 대대가 진주했는데 이들의 복장과 장비를 보고 일본인들은 모두 하나같이 놀랐다고 한다. 얼핏 봐도 모두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데다가 식량은 물론 먹을 물까지 휴대하고 다녔기 때문. 한 일본인 이장은 "이런 나라와 4년 동안 싸웠다니 믿기 힘들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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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의 표시로 일본도를 건내는 일본군 장교

해방 후 소련군 주둔 지역에서는 소련군에 의해 들어선 인민위원회가 일제강점기에 식민통치에 앞장서거나 조선인들에게 패악을 저질렀던 일본인들의 죄를 소급해서 처벌했는데, 일본인들은 이를 복수 차원의 보복재판이라 부르며 반발이 많았다. 처벌된 일본인들은 당시 법관이나 일본제국 경찰의 간부에서부터 3.1 운동 당시 조선인 시위대를 향해 물을 뿌린 소방대원과 조선인 학생을 차별했던 여교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징역형을 선고받은 일본인들은 일제 하 조선이 입은 피해복구 작업에 동원되거나 소련으로 이송되어 소련 전후복구에 갈려나갔다.

▶일제강점기 야인시대로 유명한 하야시는 1945년 8·15 광복 이후 일본인 부인과 부하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자신은 조선에 남았고 고향인 평양으로 올라갔으나 남북이 분단되고 북쪽애서 공산정권을 세우자 월남하였다. 그후 사업을 하며 생활하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구성되자 친일 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한국 전쟁 이후 한국인 여성과 재혼하였다. 건설산업주식회사를 설립, 경영하였고 대한건설협회 서울지부장을 역임하는 등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 1974년에는 서울지하철 건설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철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다. 그는 말년에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고 하며 1978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