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역사박물관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절대적 빈곤 속에서도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에서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모습들을 살펴본다. 또한 우리의 생활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다양한 사회・문화적 현상을 통해 알아본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지도 한 장에 정리한 포스터(1962.2) 5층 3전시실 전시 주제경제개발과 산업화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근대국가의 위상을 확립하는 시기였다. 남북한의 긴장상태와 대결구도는 지속되고 있었지만 정치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 시기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초고속 경제성장을 달성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우여곡절을 거쳐 본격적인 민주화시대를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경제개발의 추친, 과학기술의 발달과 보급, 산업 역군의 해외 진출, 국가안보와 자주국방을 향한 노력, 한국 경제의 성장도시화의 진전, 성장의 그늘, 새마을운동, 문화의 다양화/대중화 변모하는 도시와 농촌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과 고도성장으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었고, 이농현상이 본격화되었다. 급속한 산업화와 인구의 대도시 집중에 따른 이면에는 농촌소외문제, 노동문제, 도시빈민문제 등이 새로운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통과 통신, 대중매체가 발달함에 따라 문화가 다양해지고, 국민들의 삶이 양적인 성장과 함께 질적인 성장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시민사회의 성장과 민주주의비약적인 경제성장과 더불어 민주화의 바람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을 만들어낸 양대 기둥이었다. 오랜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내고자 했던 국민들의 염원은 대한민국에 자유와 평등,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확립시켰다. 또한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시민사회가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삶은 한층 더 풍요로워졌다. 1960~70년대의 민주화운동, 1980년대 민주화운동한미 경제 회담에 관한 보고
한국경제를 자본도입 형태에 따라 구분하면, 1950년대는 '원조경제의 시기', 1960년대 이후에는 '차관경제의 시기'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1960년대 이후 경제원조가 감소하고 차관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가 역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한 198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경제의 위상은 크게 달라졌다. 경제성장에 필요한 투자재원을 국내저축을 통해 조달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원조를 받던 나라(원조 수혜국)'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원조 공여국)'로 한국경제의 지위가 상승하였다. 원조가 한국경제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시기는 해방 이후 1950년대였다. 이 시기 동안 한국경제가 받은 원조액은 29억 75백만 달러였는데, 이 시기 최고의 수출액이 40백만 달러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당시 경제규모에 비해 막대한 원조가 도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1950년대에 왜 이렇게 막대한 원조를 받았을까?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남북분단으로 경제활동이 급격히 위축된 것을 들 수 있다. 연도별 원조금액 변화 이론적으로 원조에는 장기 저리의 유상차관도 포함되나 1950년대에 제공된 원조는 모두 무상 증여의 원조였다. 어떤 나라가 우리에게 이런 원조를 제공했을까? 원조 형태는 한국 경제에 매우 중요했다. 가령 식량 증산을 위해 비료를 도입하는 것과 비료의 국내 생산을 위해 비료공장 건설에 필요한 생산재를 도입하는 것은 향후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에서 엄청난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한국정부와 미국정부는 이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을 복구·확충하기 위해 생산재 중심의 물자 도입을 요구한 반면, 미국 정부는 국민들의 현재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소비재나 그 생산에 소요되는 원료 등을 도입하고자 주장하였다. 결국 원조 물자는 원조 공여국인 미국정부의 의사가 많이 반영되어 소비재 및 그 원료가 72% 정도를 차지하여 식료품공업, 섬유공업 등과 같이 소비재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비중은 낮지만 원조는 전쟁으로 파괴된 철도, 전력시설 등과 같은 사회간접자본의 복구 및 확충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원조는 재건과정에서 국내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거나 국내 수요는 있지만 국내 생산이 미미하여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판유리, 시멘트, 비료 공장과 같이 중요한 기간산업의 건설에도 기여하였다. 1950년대 후반 이후 미국의 원조정책은 변화하여 무상 증여의 원조는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1957년 3억 83백만 달러로 최고 수준을 보인 이후 원조는 계속 감소하여 1965년에는 1억 31백만 달러, 1973년에는 2백만 달러로 줄어들어 사실상 완전 폐지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공업화에 성공한 한국경제는 경제규모를 빠르게 확대시켰고 1986년 최초의 무역수지 흑자 달성을 계기로 대외 경제협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1986년 12월 ‘대외경제협력기금법(법률 제3863호)’을 제정하여 1987년부터 공식적으로 개발도상국의 산업개발과 경제협력을 위한 장기 저리의 유상차관을 제공하였고, 1991년에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설립하여 무상 원조를 본격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1)원조는 한국 경제 상황에 더해 냉전체제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동아시아지역에서의 지위와 역할도 중요한 요인이 되어 제공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