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몽골 제국을 확장하고 통일할 수 있다면, 그건 징기스칸의 손자일 것입니다. 서기 1260년부터 1294년까지 통치했던 쿠빌라이칸은 한반도부터 현재의 바그다드 국경 끝에 달하는 제국을 세웠습니다. 서기 1215년, 쿠빌라이는 툴루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유능한 기마병이자 전사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군사 작전에 참가했고 십 대에 이미 훌륭한 투사로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학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쿠빌라이는 원나라의 황제가 된 후 도움이 될 중국 예술과 문학을 배우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쿠빌라이는 아버지가 사망한 후 왕위 계승 서열을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드디어 대 칸의 칭호가 쿠빌라이의 큰형인 몽케에게 넘어왔습니다. 쿠빌라이는 처음에 형의 통치를 지지했고 그 충성심으로 일한(총독)의 자리를 얻었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형에게 배울 것을 배우고, 동맹을 형성하고, 고문들을 모으고, 필요할 때 전장에 나가 전사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서기 1259년 큰형의 사망 후 대 칸의 자리를 두고 동생인 (쿠빌라이보다 인내심이 매우 부족한) 아리크부카와 싸워야만 했습니다. 아리크부카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쿠빌라이는 중앙아시아 전역에 걸쳐 더 많은 자원과 여러 제후의 지지를 얻어 대 칸이 되기에 유리한 고지를 점합니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대 칸”이 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큰 그림을 그리던 쿠빌라이는 할아버지 유산의 잔재인 분열된 제국을 보고, 다시 한번 통일을 달성하고 더 큰 제국을 만들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는 중국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중국에 대한 최초 침공은 5년이나 걸렸지만, 쿠빌라이는 서기 1276년 남송의 수도인 린안을 차지할 때까지 샹양과 판청을 시작으로 착실하게 중국의 도시를 점령해나갔습니다. 관대한 지도자였던 그는 중국의 어린 황제와 그 어머니의 목숨을 살려주었고 자신의 궁궐에 포로로 들였습니다. 1278년 쿠빌라이는 결정적인 해상 전투를 통해 그의 길을 막고 있는 마지막 제후를 물리치고 황제가 되는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승리를 통해 그는 중국 전체를 지배한 첫 번째 몽골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원나라를 건국하고 세조가 됩니다. 쿠빌라이는 중국 황제의 전통 의상을 입어 전략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백성과 신하들에게 억지로 자신과 몽골의 방식을 따르게 하는 대신, 그는 손에 박힌 가시처럼 고통은 있지만 참을만한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물론 쿠빌라이는 몽골인들이 권력, 특히 정부 고위직을 거머쥐게 했지만 새로운 신하들을 탄압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제국에서는 상인, 장인, 중앙아시아인 및 몽골 귀족이 상위 계급을 차지했습니다. 한족은 중간 및 하위 계급으로 밀려났고 정부 관료로 일할 수 없었습니다. 일부는 행정직 지위를 유지했지만 고등 교육을 받은 자에 한정됐습니다. 그는 다른 종교를 용인했고 유교적 이상을 장려했으며 전통적인 몽골의 왕권제 대신 한족이 익숙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통치하기까지 했습니다. 쿠빌라이는 황제로 재위하는 동안 몇 가지 경제 및 계급의 변화를 꾀했습니다. 거래 시 지폐 사용을 촉진하고 서방 교역을 장려했습니다. 여기에는 놀랍게도 서방의 선교사를 수용하는 것과 교황 그레고리 10세와의 친교도 포함됩니다. 또한 니콜로 폴로의 아들인 마르코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마르코 폴로는 그의 일기에서 쿠빌라이를 긍정적으로 묘사했고 두 사람의 친교는 17년 이상 유지됐습니다. 중국 도자기의 진가를 알아본 쿠빌라이 덕분에 새로운 정권하의 상인과 장인은 부분적 세금 우대 조치를 받았습니다. 귀중한 교역로를 통제 및 보호하는 몽골인의 능력 덕분에 쿠빌라이의 관리하에 경제가 성장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쿠빌라이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자애로운 황제로 보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에게 동의하거나 그의 정책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족은 새로운 계급 구조와 그에 따라 높아진 세금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쿠빌라이의 사촌 카이두는 쿠빌라이의 정권 내내 지속적인 위협이었습니다. 그러나 대 칸 및 황제 자리를 빼앗으려는 카이두의 수많은 시도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쿠빌라이는 재위 기간 내내 이미 방대한 제국을 더욱 확장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금방 항복하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저항하는 지역도 있었는데, 가끔은 전투 기량보다는 운이 좋았던 것 같았습니다. 그는 일본을 두 번 침략했으나, 일본의 우월한 해군 또는 시기적절한 폭풍인 가미카제(“신이 일으키는 바람”) 때문에 두 번 모두 실패했습니다. 34년간 지속한 쿠빌라이의 치세는 1294년 그가 사망하며 끝났습니다. 그가 총애한 아내와 장남의 죽음이 그를 우울증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는 79살까지 살았습니다.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이용약관 | 기사제보/Press | 광고/제휴문의 | 루리웹소개 | 고객센터 | 루리웹 RSS | 모바일웹으로 고정 루리웹닷컴 |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0 B-602 | 등록번호 서울 아02156 | 발행인 박병욱 | 편집인 이장원 | 등록일 2012.06.13 | 청소년보호책임자 진인환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사 또는 글쓴이에 있으며 ruliweb의 입장과 다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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