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옛터는 어디 - hwangseong-yesteoneun eodi

황성의 적〉(荒城의 跡), 또는 〈황성옛터〉는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1928년 발표된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노래의 대중가요로, 한국인이 첫 번째로 작사와 작곡을 한 대중가요이다.[1] 이때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이정숙의 〈낙화유수〉가 한국인이 작사·작곡한 첫 번째 노래라고 하는 의견도 있는데, 유성기로 발표된 첫 번째 곡이 〈낙화유수〉(1927년 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곡으로 1929년 동요가수인 이정숙이 취입해서 발표.)고, 최초로 불린 노래로 치면 1928년부터 나운규 작 〈아리랑〉의 주연이었던 영화배우 신일선이 부르고, 이후에 이애리수가 1931년 봄 취입하고, 1932년 빅타 레코드를 통해 발매되었던 〈황성옛터〉(발매할 당시 라벨에 인쇄되었을 때는 황성의 적으로 인쇄되어 있었다.)가 최초라고 볼 수 있다. 이 노래를 짓게 된 계기는 한국 최초의 남자 무용가로 불리는 조택원이 전수린에게 한 순회 극단의 연주자로 추천을 하고, 순회를 하던 도중 전수린은 개성에 도착했는데, 개성에 위치한 고려의 궁이었던 만월대가 거의 흔적도 없이 터만 남은 것을 보고 즉흥적으로 만들게 되었다.[2]

반응[편집]

이애리수가 신일선 다음으로 〈황성옛터〉를 부르기 시작하고, 〈황성옛터〉는 큰 인기를 얻게 된다. 배우로 활동했던 이애리수는 〈황성옛터〉를 단성사에서 불렀는데 관객들은 이애리수에게 함성을 보내는 동시에 망국의 서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불리게 되었고, 조선총독부는 이 곡을 금지시키고, 부르는 조선인을 족족 처벌하였으나,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일본에 대한 맞섬으로 이 노래를 부르게 된다. 이후 이애리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레코드로 〈황성옛터〉를 취입하게 되고, 1개월 동안 5만장이 판매되었다. 당시 레코드와 유성기가 서민들의 물건이 아닌 것을 감안했을 때, 이는 5만장보다 더 큰 가치이다. 〈황성옛터〉의 파급력은 다음해인 1933년까지 계속된다. 1933년에 이애리수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배우 겸 가수였던 이경설은 〈고성의 밤〉이라는 제목으로 황성옛터의 가사를 그대로 가져와서 불렀으나, 〈황성옛터〉를 부르는 것이 금지가 되었듯이, 〈고성의 밤〉은 발매 즉시 치안방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처분되고 회수당하기도 하였다.[3] 〈황성옛터〉는 이애리수의 인기까지 드높이게 했는데, 이애리수의 명성이 떨어지고, 이난영, 왕수복, 선우일선 등 신예 가수들이 대거 연예계에 뛰어드는 1935년에 삼천리라는 잡지에서 10대 가수 인기투표를 실시했을 때, 가수 생활을 은퇴하고 1년이 넘었음에도 10위권 안에 들기도 했다. 금지곡이기도 했던 〈황성옛터〉는 이례적으로 재발매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61년에는 김진규, 문정숙, 황정순, 최남현 주연의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하였다.


박정희가 이 곡을 좋아하였는데, 박정희가 초빙되었던 육군 본부 위문 공연에서 가수 조영남이 황성옛터를 부르라고 지시를 받았으나, 조영남은 〈황성옛터〉가 아닌 〈각설이 타령〉을 불렀고, 분위기가 싸해져 뒤늦게 황성옛터를 세 번 정도 불렀으나, 가사를 몰라 박정희는 들어가라는 말만 했다고 한다. 여기서 〈각설이 타령〉의 가사인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부분이 이 일이 일어나기 1년 전에도 육군 본부를 들렀던 박정희를 비난한다는 오해의 소지가 생겨 심문을 받기도 했다.[4] 1989년 9월 26일에 〈황성옛터〉의 작사가 왕평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시 조양공원에 황성옛터 노래비가 건립되었다.[5] 노래비 뒷면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혼을 심은 우리들의 노래 황성옛터
 

— 〈황성옛터〉의 노래비


이후 2009년 10월 10일 청송향토문화벌전회의 후원을 받아서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31번 국도볕 목계숲에 〈황성옛터〉의 두 번째 노래비가 건립되었다. 청송군은 왕평이 5세부터 7세까지 지낸 곳이기도 하며, 왕평의 묘소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6]

같이 보기[편집]

  • 이애리수
  • 전수린
  • 왕평

각주[편집]

  1. “100년 전 모던 뉘우스 - 근대의 희로애락 ‘유행가’”. 2017년 2월 2일. 2019년 8월 5일에 확인함.
  2. “민족의 연인이었던 막간가수, 이애리수”. 2018년 8월 17일. 2019년 8월 5일에 확인함.
  3. “원조 ‘눈물의 여왕’ 이었던 이경설(李景雪) - 논객닷컴”. 2019년 8월 5일에 확인함.
  4. '라스' 조영남 "노래부르다 강제입대, 헌병대에 끌려갔다"”. 2010년 8월 26일. 2019년 8월 5일에 확인함.
  5. “[명복을 빕니다]‘황성옛터’ 가수 이애리수 씨 별세”. 2009년 4월 2일. 2019년 8월 5일에 확인함.
  6. “청송 송강리 '황성옛터' 노래비 제막”. 2009년 11월 24일. 2019년 8월 5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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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철원 평화전망대에 오를 때마다 필자는 왠지 ‘센티멘탈’해진다.

나즈막한 전망대 앞으로 펼쳐진 드넓은 평원의 이름은 풍천원이다. 저곳은 1100년 전인 905년 풍운아 궁예가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태봉국의 도성터이다.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면서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세계를 꿈꿨던 궁예였다. 그렇지만 궁예의 꿈은 불과 13년 만에 물거품이 된다.(918년)

“사졸들과 고락을 함께 해 인심을 얻었지만…나중엔 가혹한 정치로…궁궐만 크게 지어 원망과 비난을 자초했다”(<삼국사기> <고려사> 등)는 것이다. 왕건세력에 의해 축출된 궁예는 굶주림에 보리이삭을 몰래 끓여먹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임금과 신하를 짐승 죽이듯 풀베듯 했으니 실로 극악한 사람”이라며 몰아붙였다. 자신을 비난한 석총 스님을 철퇴로 때려죽이고, 부인인 강씨에게 간통죄를 뒤집어씌어 불에 달군 방망이를 음부에 쳐넣어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감상(感傷)이 든다. 과연 그랬을까.

역사의 패배자인 궁예에게 너무 심한 패륜아의 딱지를 붙여 매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선 전기 문인 서거정(1420~1480) 역시 풍천원에 남겨진 궁예의 흔적을 보고는 센티멘탈한 시심(詩心)을 드러냈다.

“나라가 깨져 한 고을이 되었네.(國破山河作一州) 태봉의 남긴 자취가 사람을 시름겹게 하네(泰封遺跡使人愁) 지금은 미록(고라니와 사슴)이 와서 노니는 땅이 되었네.(至今미鹿來遊地)”(<동국여지승람>)

50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서거정의 시에 감정이 고스란히 이입되는 것은 어인 일일까.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다. 서거정이 봤던 태봉국 도성의 흔적은 지금 이 순간과 큰 차이가 없었을 테니까. 왜냐. 궁예 이후 망국의 폐허로서 터부시됐던 도성터는 지금 비무장지대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알다시피 정전협상상 비무장지대 출입 자체가 금지돼있지 않은가. 그러니 예나 지금이나 저곳은 금단의 땅인 것이다. 게다가 한국전쟁 당시 평강-김화-철원을 잇는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의 한 꼭지점이어서 피아간 엄청난 화력이 집중됐던 곳이다. 주변 산과 구릉의 별명을 보면 심상찮다. 피아간 1만8000여 젊은이들이 희생된 백마고지와, 그 백마고지를 획득하지 못한 김일성이 통곡했다는 김일성고지(고암산), 그리고 젊은이들의 피를 적셨다는 ‘피의 500능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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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때 확인된 태봉국 도성터의 석등. 흙으로 쌓은 성벽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필자의 감상을 더욱 자극하는 것은 태봉국 도성터의 딱한 신세이다. 즉 휴전선(군사분계선)이 태봉국 도성을 거의 정확히 반으로 가르고 있는 것이다. 그 뿐인가. 서울~원산 간 경원선 철도가 남북으로 갈라진 도성을 동서로 찢어놓았다. 1100년 전 궁예의 야망과 좌절이 묻힌 태봉국 도성터는 이제 분단과 전쟁·냉전이 갈라놓은 비극의 상징터가 된 것이다. 일제 때 조사를 보면 태봉국 도성터의 외곽성은 12.5㎞, 내곽성은 7.7㎞에 이른다. 조선의 한양도성(17~18㎞)에 견줘도 손색없는 엄청난 규모이다. 궁예는 조선보다 500년 정도 앞서 한양에 버금가는 도성을 짓고 고구려의 후예로서 대동방국의 웅지를 펼치려 했던 것이다. 지금도 흙으로 쌓은 도성의 흔적은 무성한 수풀 사이로 잘 남아있다고 한다. 일제가 만든 <조선보물고적도보>는 왕궁성 부근의 석등과 남대문터의 귀부 등을 사진으로 담아놓았다.

필자는 최근 남북한의 개성 만월대(고려 궁성터) 공동발굴 재개 소식을 듣고 다시 한번 감상에 젖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919년(태조 2년) 세운 만월대는 440년 고려 역사를 상징하는 ‘황성옛터’가 아닌가. 1928년 작곡가 전수린이 고향(개성)을 찾았다가 폐허가 된 궁궐터를 떠올리며 곡을 썼고 작사가 왕평이 즉흥적으로 노랫말을 붙였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이 해 가을 여배우이자 가수인 이애리수가 단성사에서 구슬프게 부름으로써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필자는 이 곡을 듣다보면 500년 전 서거정의 시가 절로 떠오른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남북이 힘을 모아 왕건의 옛터(만월대)를 공동 발굴한다는데, 그렇다면 궁예의 옛터(태봉국 도성터)는 어떨까.

휴전선을 딱 반으로 가른 채 분단과 전쟁, 냉전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궁예의 흔적을 남북이 손잡고 발굴한다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 전문가들이 오손도손 의견을 나누며 공동조사하는 모습…. 그것이 바로 궁예가 이루지 못한 세계, 즉 영원한 평화가 깃든 세상의 모습이 아닐까. 때마침 북한도 남북 간 학술교류를 ‘단군 후손들의 애국사업’이라고 강조한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