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친구가 죽었 을 때 - chinguui chinguga jug-eoss eul ttae

자살위기 징후

친구가 죽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면,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난감하시지요?

사람들이 자살을 생각할 때 보이는 징후들이 있습니다.

주변에서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언어적 징후

-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의사표현: '죽고 싶어' '끝내버리고 싶다'

- 죽음에 대한 간접적인 의사표현:

'절망적이야' '사는 게 무의미해' '내가 지금 죽는다고 슬퍼할 사람이 있을까?'

불쑥 '미안하다' '안녕' '잘 지내' 등의 말을 할 때

트위터 등에 자살과 관련된 낙서, 글을 쓴다.

행동적 징후

- 평소 아끼던 물건들을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거나, 오랫동안 여행을 떠날 것처럼 주변을 정리정돈하거나 무단결석 등의 돌출행동을 보인다.

- 자살에 필요한 도구를 갖고 있거나 유서를 쓴다.

- 자살 사이트에 자주 관심을 갖는다.

기타 징후

- 어두운 표정과 대인관계 회피, 좋아하던 활동에 흥미가 감소된다.

- 잦은 지각과 결석 등 일상적인 학교생활의 어려움이 있다.

- 불면증, 식용저하, 체중감소 등 변화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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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할지 모르겠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아주 황당하고 어이없고 갑작스럽고 비현실적인 그런 일이 벌어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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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의 부고를 들은 그 시점, 나는 친구와 찜질방에 있었다. 맥반석 계란과 식혜를 잔뜩 먹고, '함께 뒹굴거리는 행복이 이런 건가 보다' 하면서. 평소보다 더 평화로웠다. 친구와 나는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며 깔깔거렸다. 소금방에서 몸에 소금을 묻히며 뒹굴다가, 산림욕방에 누워서 뒹굴뒹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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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페이스북 뉴스피드에서 마음에 걸리는 글을 본 바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Y의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었다. "너 사랑하는데 밉다. 실감이 안난다. 이따가 갈게."라는 글. Y의 죽음을 암시하는 글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설마- 그럴리 없을거라 생각했다. 다른 댓글도 없었고, 설마, 말도 안되지 했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래도 마음에 걸리긴 했는지,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 글을 본 얘기를 꺼내긴 했다. 친구와 Y는 모르는 사이였지만, 친구에게도 그 글을 보여주니 심상치 않다고 했다. 불안했지만,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아니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나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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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속하게도,

산림욕방에서 부고를 들었다. 카톡 메세지로. 부고를 들은 건 우연에 가까웠다. Y와 아는 사이인 줄도 몰랐던- 나와는 대학에 와서 밴드를 같이했던- 다른 친구가 내게 연락을 해온 것이다. 

"너 Y 알지? 페이스북 함께 아는 친구에 니가 있길래. 걔 죽었대. 자살했대." 

친구와 Y는 별로 친하지 않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동창 사이에 부고가 돌고 있다고. 자기는 오늘 못 가본다며. 너무 아무렇지 않은 연락이었다. 이런 연락이, 이렇게 오는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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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해졌다. 

넋이 나갔다는 말은 그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인지.  

그냥 현실감이 없었다. 어떡하지. 이게 무슨 일이지. 나는 지금, 뭘 어째야 하지. 눈물은 전혀 안났다. 실감이 안났으니까. 이건 Y의 연극일까? 장난인가? 장난이라면 장난이 심하잖아. 몰래 카메란가? 꿈일까. 혹은 다른 그 무엇일까. 나는 현실 외의 모든 다른 선택지를 떠올렸다. 어쨌든 내가 지금 해야할 일은 Y 그리고 나와 함께 친했던 친구들에게 Y의 소식을 알리는 거였다. 혼자 감당하고 있기에는 버겁고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냥 빨리 그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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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Y와 가장 친했고, 나와도 가장 친한 H에게 전화를 했다. H는 전화를 받지 않아서, 카톡 메시지를 남겼다. 보자마자 전화하라고.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답장이 왔다. 수업중이라고. 나는 그냥 지체하지 않고 말했다. 야. Y가 죽었대. H의 첫마디는 이거였다. "뭐?" 그 다음 말은 이거였다. "아시발." H는 사인조차 묻지 않았다. H가 묻지도 않은 Y의 사인을 내가 말했을때, H는 말했다. "뻔하지." 나는, 뻔하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인을 듣고 놀라진 않았었다. 하지만 H는 나보다 Y에 대해 더 잘 알았으니, 그애에겐 뻔하게 느껴지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M언니는 전화를 받고 내가 말하자마자 울었고, A는 넋이 나가 말을 횡설수설했으며, C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연락을 할만큼 하다 어느 순간 나는 Y의 소식을 반복적으로 전하기가 버거워져서, 나머지 연락은 H가 해주기로 했다.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조의금도 챙겨야 했다. 목욕탕 가는 동네 백수 차림이었던 데다가, 돈이 한 푼도 없었으니까.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눈물은 안났다. 그냥 Y는 왜 그랬을까. 왜 난 몰랐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해서, 까만 블라우스에 까만 바지, 까만 코트와 까만 구두. 온통 검정색의 옷을 챙겨입고. 렌즈를 빼고 안경을 썼다. 가면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렌즈를 낀 채로 울어도 되는지를 몰라서. 그리고 베를린에 가려고 모아둔 현금 중 10만원을 꺼냈다. 그 순간에도 백수라는 내 현실은 어쩔 수 없는 건지. 5만원과 10만원 사이에서 고민이 됐다. 가면서 생각해봐야지 하면서 10만원을 꺼냈다. 순간, 그런 내가 싫어졌다. 친구가 죽었는데,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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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은 Y가 살던 동네 병원에 차려져 있었는데, 집에서는 너무 멀었다. 두 시간은 족히 걸렸다. 

낯선 동네에서 병원을 찾아가며 난 이 동네에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Y의 동네에 온 적이 없었다. Y는 우리집에서 자고 간 적도 있는데. 나와 아이들은 만날 때도 Y네 집에선 먼 시내에서만 주로 만났다. 거기가 Y 외의 모든 애들에게 가까운 곳이었으니까. Y는 매일 혼자 이 먼 길을 돌아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외로웠을까. 나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장례식장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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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리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이 없어서 비를 그냥 맞으며 장례식장에 들어갔다. Y의 이름은 상황판에 나타나 있지 않았다. 몇 호실인지 알면서도, 이름이 없어서 조금 헤매다가, 빈소에 앉아있는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하고 들어섰다.

내가 들어가니 아마도 Y의 가족 그리고 친척들일 분들이 일어섰다. 나는 우선 조의금을 내려 했는데, 정신이 없어 입구에서 봉투를 챙기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어떻게 내지 봉투가 어디있지 하고 있는데, Y의 가족분들은 조의금을 받지 않고 계셨다. 5만원과 10만원 사이에서 고민하던 내가- 너무, 어이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기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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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소에 들어서서 Y의 영정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이 모든 일이 연극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사실 그 순간의 기억은 흐리다. 오롯이 아득하다. 뭘 어찌해야하는지도 익숙하지 않아서. 국화 꽃을 Y의 앞에 올려놓고. 고개를 숙이고 서서 기도했다. 그 때 처음으로 눈물이 났다. 울었다. 상주로 서 계시던 Y의 어머니께서는, 내가 울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리셨다. 어머니와 나는 서로를 안고 울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어떤 친구냐고, 이름은 뭐냐고 물으셨다. 나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 앉아있는 친구들에게 갔다. 내가 울자 언니들이 휴지와 물을 줬다. 

빈소에서의 시간은, 그냥 오롯이 Y 생각만을 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다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Y에 대한 생각에 빠져, 말없이 혼자 멍하니 있었다. 가장 많이 든 건 죄책감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H와 C가 왔고, 막차시간이 돼서 우리는 집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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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의 며칠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혼자 밥을 먹다가도, 음악을 듣다가도, 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며칠 후 Y는 꿈에도 나왔다. H와 내가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는데, Y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나타났다. 난 너무 놀라서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거냐며 소리를 질렀고, Y는 대개 죽다 살아돌아온 사람들이 하는 저승사자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Y에게, 너무 놀라서 진정이 안된다면서, 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고 투정을 부렸다. 꿈에서 난 정말 다행이고 또 행복하다고 생각했고, H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지었다. 나는 꿈을 꾸자마자 일어날 시간이 아닌데도 잠에서 깼고, 깨고 나서 방금 꾼 게 꿈이라는 걸 깨닫고는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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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을 다녀오는 길에는, 부고를 알려준 친구로부터 Y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몰랐던 Y의 이야기들. 

번호를 자주 바꿨던 Y와는 한 달 전 나누었던 한 번의 카톡 대화만이 남아있었다. 한 달 전 Y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었다 했다. 세상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는 과정이었을지,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려한 것이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건 그 대화에서 나에게 호의적이고 친절했던 Y와는 달리, 나는 Y를 조금 귀찮아했고, 표면적으로 대했다는 사실이다. 그 짧은 대화에서도 나의 무정함이 충분히 느껴졌다. Y도 느꼈었겠지. Y는 나에게 조만간 보자고 했고, 힘내라고 했고, 잘지내라고 했다. 나는 그런 Y에게 "응 너도 잘지내ㅋㅋ"라고 영혼 없는 마지막 말을 남겼고, 조만간 보자던 Y와 나는 다시는 볼 수 없는 사이가 돼버렸다. 

그래서, 나는 내내 죄책감에 휩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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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한 사람.

Y에게 내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던 건 아니다. Y와 나는 친한 친구였다. 재수학원에서 만난 Y와 나는 같은 무리의 유일한 동갑 여자 친구였다. 언니들 둘에 우리 둘. 우리는 넷이 친했다. 학원을 다닐 때는 매일 점심 저녁을 같이 먹고, 모의고사를 보는 날에는 이곳저곳 함께 놀러 다녔다. 

그 때의 Y와 나는 이런 저런 이야기도 많이 했다. 그 때의 Y는 아직 남자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었고, 공부를 열심히 했고, 모범생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그다지 모범적인 인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Y는 그런 나를 어른이 아이 바라보듯 바라보며 챙겨주고 때론 충고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나도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막 사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무리 중에 유이하게 담배를 피지 않는 나와 Y는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다. 집에 가는 길 밤 10시가 넘은 시각, 지하철 역에서 이야기하며 수많은 지하철을 그냥 흘려 보냈고, 더 이상의 지하철을 놓치면 집에 갈 수 없을 쯤이 되어서야 헤어진 것도 여러 번이었다. 하루는, 이야기를 하다 멈추기 싫어서, 내가 우리 집과는 반대 방향인 Y네 집 쪽 방향으로 Y와 함께 2호선 지하철을 타서 한 바퀴 돌아 집에 간 적도 있었다. 이것도 벌써 7년 전 이야기라, 그 때 무슨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는지 자세한 대화 내용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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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Y가 지방의 대학을 가고, 내가 삼수를 하게 되면서 Y와 나는 자주 볼 수 없는 사이가 됐다. 그럼에도 중간에 Y가 힘내라고 찾아왔던 일은 기억이 난다. Y가 아무 날도 아닌데 말도 없이 가디건을 사서 선물이라고 주어서, 나는 이런 걸 왜 주냐고 했었고, Y는 내가 생각나서 샀다고 했었다. Y는 꽤나 따뜻한 아이였다. 20대 초반의 나는 소위 '츤데레'처럼, 좋아하는 사람일 수록 드러내놓고 애정을 표현하는 법이 없고 삐딱하게 구는 사람이었는데, Y는 나와 달랐다. 진지하고, 사려 깊은 아이였다. 언제나 겉으로 삐딱하게 구는 내게 면박을 주면서도, 내 진심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아는듯, 나를 이해해줬다. 

우리는 언니들과 함께 종종 만나 서로의 생일을 축하했고, 둘이 만나 쇼핑을 했으며, 카페에서 수다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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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시간이 흘러 내가 대학에 오게 됐고, 바빠진 언니들과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주 보지는 못하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Y와 나는 꽤 꾸준히 만났다. 그리고 무렵 Y는 많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니 변한 건 Y가 대학에 간 후였는데, 내가 나 사는 데 바빠 Y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안경을 벗고 화장을 하기 시작한 Y는 예뻐졌다. 그리고 Y는 좀 달라졌다. 클럽을 다니고, 소개팅을 하고, 미팅을 하고. 언젠가부터 부쩍 남자 얘기를 많이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언니들보다는 학원의 남자아이들과 노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와는 학원을 다닐 때부터 친했지만 Y와는 친하지 않았던 H나 C, A 같은 동갑내기 남자애들과 놀았다. 우리는 만나면 술을 마셨고, 시덥잖은 가벼운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나는 Y와 진지한 얘기를 하지 않게 됐고, Y는 나보다는 H와 더 친해졌다. 

그 사실을 H를 통해 알게 되는 일이 종종 생겼고, 거기서 소외감을 느껴서 Y가 미워졌던 건지 어쨌는지 나는 시덥잖은 이유로 Y를 멀리하게 됐다. 중간중간 몇 가지 Y가 나를 화나게 했던- 사건이 있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별 일도 아니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정도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 별 일 아닌 몇 가지 일이 당시엔 Y와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보니, 나에게 Y는 그저, 만나면 남자 얘기만 하는 친구, 그런데 한 남자와 진득하게 만나는 일은 없는 친구, 맨날 나에게 소개팅을 시켜달라고만 하는 친구, 나보단, 남자가 더 중요한 친구. 가 되어있었다. 이게, Y에게 무정해진 나에 대한,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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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Y가 남자 얘기만 한다는 사실에 짜증을 냈을뿐, Y가 왜 그러는지 궁금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카톡을 수시로 지웠다 깔았다 하고 핸드폰 번호를 바꿔대는 Y의 멘탈이 이상하다고 뒤에서 욕했지만, 정작 Y보고 너 대체 왜그러냐고 물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같이 노는 친구들 중에서도 나는 Y의 멘탈에 대해 가장 나이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내 기준으로 보면 Y는 힘들 일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삼수를 하고도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집이 망하고, 연애 또한 망하는 그런 20대 초반을 겪으며, 나는 내 자신을 동정했고, 내 세계에서 '힘듦'의 기준은 끝도 없이 높아졌다. 아르바이트 시간을 피해 수업 시간표를 짜고, 우울해서 상담소를 다니던 시절의 나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든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른 이유로 힘들 수 있다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좋은 직업이 보장된 좋은 대학에 가서 예뻐진 외모로 멋있는 남자들을 바꿔가며 만나고, 사고 싶은 옷도 맘껏 사고, 대학을 졸업하고는 안정적인 직업을 얻어 즐겁게, 외제차까지 사서 몰고 다니는 Y는 나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지, 힘든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Y를 이해하지 못했다. Y도 이해하지 못할 나에게 굳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는 어느새 Y를 가장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애들이 Y의 멘탈을 걱정할 때도 가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친구들이 모여 Y의 멘탈을 걱정할 때, 나는 "Y가 좋은 남자 못만나서 그런 거 아냐? Y도 괜찮은 남자 만나서 안정적인 연애하면 괜찮아지겠지." 라고 말했었고, Y와는 친했던 순간이 없는 C는 내 말에 "야 아니야. Y는 누굴 만나건 걔 자체가 안정적인 연애를 할 수가 없어."라고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보다도 C가 Y를 잘 알았던 것 같다. C도 알 수 있을 정도로 Y의 멘탈은 이미 망가져 있었는데, 나만 그걸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에도 한결같이 Y는 나에게 친구로서의 애정을 표현했는데, 나는 그녀에게 꾸준히 무정했고, 무책임했으며, 무관심했다. 그래서, 그녀를 못봤다.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놔봤자, 결론은 하나다. 나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것. 

Y에게는 내가 소개해준 동생 K가 있었다. K는 내가 삼수할 때 같은 학원 동생이었는데, Y의 한 학년 밑으로 Y와 같은 대학에 가게 되어, 나는 둘을 소개해줬었다. 그리고 그 둘은 지방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나보다 더 친해졌다. 

K에게 아주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부고를 뒤늦게 들었다고. Y를 공동으로 아는 사람이 나뿐인 K는 Y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물으며 나에게 자기가 알았던 Y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내 터널을 빠져나가느라 오로지 내 터널 끝 밖에는 보지 못하던 그 시점에, Y는 끝이 막힌 터널에 갇혀 있었던 모양이다. Y는 지방의 그 학교에서 꽤나 힘들어했다고 했다. K가 아는 것만 해도 3번의 자살시도를 했다고 했다. 그 전에, H는 Y가 병원에 다니며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고 했었다. 전부 나는 모르는 얘기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몰랐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 알았더라면, 내가 뭔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을 그렇게 보내진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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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는 죽기 전날 밤 SNS에 죽음을 암시하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는 그 SNS를 하지 않아, 그 글조차 보지 못했다. 그리고 Y가 그 글을 남기기 전날, 나는 H 그리고 M 언니와 오랜만에 만나 즐거운 술자리를 가졌다. 내가 모임을 주도한 술자리였는데, Y가 있어도 자연스러울 자리였다. 하지만 나는 Y를 부르지 않았다. Y가 한 달 전에 조만간 보자고 한 말도 잊고 있었고, 그냥 잘나가고 있는 Y를 보면 작아질 내가 걱정된 무의식 탓이었는지, Y를 부를 생각도 안했다. 

셋이 모였을 때 M언니는 첫 마디로 "Y는 요새 어떻게 지내?"냐고 했고, 나는 "뭐 잘지내겠죠. H가 알텐데?"라고 했다. H는 그냥 웃고 그렇게 넘어갔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도 Y에게 연락해볼 생각 한 번 안했다.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그 술자리에 대해 후회했다. 그 날 Y를 부를걸. 그럴걸. 

물론, 그랬더래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그랬더라면 적어도 Y를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었을 것이다. Y를 마지막으로 본지 어느새 1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있었다. 사실 Y를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리고 조만간. Y가 말한 조만간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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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의식 과잉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지만 Y의 죽음에 나의 책임도 어느정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그 날이후 나는 자주 죄책감에 휩싸인다. 

Y가 살아 있었을 때 이 모든 걸 알았더라면, Y가 죽기 이틀 전 함께 술을 마셨더라면, Y가 마지막 순간에 남긴 그 글을 내가 봤더라면, 그랬더라면 나는 이 모든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못그랬었을 것이다. 나보다 훨씬 많은 걸 알고 있었던 K도 H도, Y의 가족도 차마 못한 일이니까. 

하지만 미안하다.

힘든 시간을 외롭게 보냈을 Y에게 미안하다. 너의 힘듦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서. 니가 왜 힘든지 궁금해하지 않아서. 너는 알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널 뒤에서 손가락질하기만 했어. 니 앞에선 아닌 척 했지만 뒤에선 너에 대해 차가운 시선으로 뾰족한 말만 했었어. 이제 용서를 구할 너는 없지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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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내가 잊지 않기 위해 쓴다. 언제든 이 글을 보면 떠오르도록, 가장 구체적으로 썼다. 

다시는 다른 사람의 힘듦을 내 기준으로 쉽게 재단하고 말하지 않기를, 힘든 친구에게 먼저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기를, 나에게 의지하려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기를, 마음을 알아주기를, 그래서 후회하지 않기를, 다짐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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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가 보고싶다.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기를.

2009년 어느 새벽 우리가 같이 들었던 노래 

달빛에 흔들려 어디로 가는 건 진 몰라도, 우리 서로 한없이 취해서 보냈던 그 시간들은, 나에게도 정말 소중했었어.

행복했었다는 너의 마지막 말이 정말 진심이었기를 바랄게. 그리고 지금은 더 많이 행복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