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아 맥 취소표 알리미 - yong-a maeg chwisopyo allimi

다른아맥도 좋아요
그러나 용아맥은 대체 불가예요

저 도민인데 테넷을 용아맥으로 3번 봤어요
2번은 동네아맥으로요

크기와 사운드가 정말 압도당합니다

사람들이 왜 용아맥만 피터지게 예매하겠어여. 바보 아닌 이상에야 뭔가가 있으니 그렇겠죠.?

윗분이 말씀하신대로 용아맥 알리미 켜고 알람 오자마자 좌석 예매하려다 여러번 이선좌 당해서 표 못구한 1인입니다 ㅜㅜㅜ
이번엔 반드시 용아맥 가즈아~~~~

핫피플만 간다는 용아맥 예매하기!!

제임스 카메론 제작 X 로버트 로드게리즈 감독이 만나 연일 화제를 불러일이키고 있는 영화!

키시로 유키토 만화 <총몽>이 원작인 “알리타”는 기술적 한계로 2003년부터 제작 시기를 기다리게 됐다고 해요! 그렇기 때문에 3D로 봐야지만 그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하는데요!!

용산CGV IMAX관 예매는 실로 치열합니다ㅠㅠㅠㅠㅠ

여기서 팁!!!

용산 IMAX 예매하기 및 좋은 자리 선점!!

J~M열은 신의좌석 그외도 관람하기에 나쁘지 않으니 아이맥스를 처음 보시는 분들은 포기하지마세요!!

그렇다면 예매시기는?

혹은 관람 2시간 전부터 취소표가 생기기도 하니 놓치지 마세요!!!

저도 겨우 성공했답니다!!!๑>ᴗ<๑ 그럼 모두 용산 아이맥스관에서 영화 관람에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을 누리시길 바래요!!!!

오오 꿀팁 감사합니다!! 전 왕십리 아이맥스에서 몇번 본적 있는데 그냥 보는거랑 너어어무 차이가 커서 놀랐어요 꼭 아이맥스로 봐야하는 영화들이 있더라구요 근데 맨날 예매 못해서 못본다는게 함정..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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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가 봉효 (郭嘉 奉孝) A.D.170 ~ 207

지금까지 인물들 관련 칼럼을 게시하면 꼭 올라오는 요청이 있었다. "곽가도 나중에 다뤄주세요" 거의 매번 여러 분들에 의해 올라오는 요청이였고 내심 곽가의 인기와 인지도에 놀라웠다...ㅎㅎ 그 인재 많고 재사 많던 위에서, 본인도 여느 모사들 못지 않게 빼어나던 조조의 총애를 받았던 책사면서 한편으로는 그 활약이 많지 않고 생존기간조차 짧아 그의 업적은 거품이 많이 끼었다하여 '곽푸치노', 그의 가치는 과대평가 되었다하여 '곽대평가'라고도 비판받는 동전의 양면같던 사나이 "곽가"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영천군 양적현이라고, 지금 중국 허난성의 위저우시 태생, 순욱과 동향이고 옛날 후한 기준 허창의 북서쪽에 위치한 지역에서 나고 자랐다. 그의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의 행적들은, 말 그대로 "천재" 그 자체였다. 학식이 깊었다는 이야기는 없으나, 누구와 이야기 나누던.. 무엇으로 이야기 나누건 거침 없었으며 야망의 스케일도 크고 상당히 담대한 편이라 이미 살던 지역 일대에서는 '뭐가 되도 될 놈' 이라는 평판이 자자하던 양반이였다. 음주가무와 당시 사람들 기준의 일탈적인 행동들도 좀 잦았던 듯 하며, 말도 그리 나긋나긋이 하는 편이 아니였고 직언직설을 하는 등.... 뭐랄까, 이런 비교는 좀 웃기지만 '스티브 잡스'가 저 나이였을 당시와 스타일이 비슷했던거 같다. 그래서인지 주변의 호불호도 많이 갈려, 그의 진가를 알아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를 인격적으로 좋아하는 이는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본래는 원소에게 먼저 임관을 하고자 찾아갔었다. 나중에 원소도 다룰 예정이라 그때도 언급할테지만, 역사는 승자의 편이고, 여러분들이 접한 삼국지는 대개 소설인 삼국지연의이고 거기의 원소가 찌질이로 그려져서 그렇지, 원소는 그냥 단순한 찌질이가 아니였다. 당대에서 가장 명성 높고 실력과 경력과 집안이 상당하던.. 누군가 황건적의 난 이후 아작난 후한을 다시 일으킨다면 그 영순위로 꼽히던 게 원소였다. 그래서 어지간한 이름 있는 자들이 가장 선호하던 것도 원소의 세력에 임관하는 것이였고 응당 곽가도 가장 먼저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찾은 사람이 원소였다. 허나, 그럼 그렇지... 며칠의 대기 끝에 만나 이야기 나눈 원소는 곽가 스타일이 아니였고, 당시 원소의 최측근들 중 하나였던 신평과 곽도에게 원소 뒷담화를 남긴 후 박차고 나와 집에서 놀다가 아끼던 책사인 '희지재'의 사망으로 책사에 T/O가 나서 거기 알맞는 사람을 찾던 조조에게 순욱의 추천으로 임관하게 된다. 당시, 순욱도 곽가와 직접 아는 사이는 아니였고 순욱 또한 자기고향에서 머리 좀 돌기로 이름 난 곽가의 명성을 듣고 조조에게 추천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조조와 곽가는 서로 첫 대면 자리에서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운명임을 직감한다......뚜둥... 신입으로 입사한 주제에 첫 시작부터 제법 높은 직위를 받아서 조조를 돕게 되었는데, 사실 원소와 비교했을 때 뒤쳐질 뿐 조조도 이미 당시에 원소 다음가는 튼실한 세력가였다. 오히려 외형성장에 메달렸고 조직내 유연성이 매우 떨어지는 구시대적 조직을 이끌던 원소보다 새롭게 떠오르며 개방적이고 효율과 내실을 중시하는 조직을 이끄는 조조가 응당 곽가에게도 더욱 실력 발휘하기 좋은 조직이였음이 맞다. 비교하자면 원소의 세력은 현재 국내의 대기업들과 엇비슷하고 조조의 세력은 미국 실리콘밸리의 IT기업들 비슷한 느낌이였다. 아무리 능력이 좋다한들 자유분방하던 곽가로서는 당시 조조말고는 딱히 자기 재량을 펼칠만한 세력도 없었으리라 본다.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곽가같은 싹수부터 다른 신참이 영입되었음에도 노련하고 뛰어나던 조조의 다른 기존 책사들도 일절 텃새같은게 없었다고 한다. 그의 가장 큰 단점이며 아쉬운 한 가지는 역시 누가 뭐래도 "단명"이다.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으나 위서 정곽동류장류전, 정사 등을 볼 때 아마도 간이 안좋았던 것 같다. 잦은 과음과 부족한 수면 및 특히 스트레스가 그의 간손상을 부추겼을 듯.... 하여간 우루사만 꼬박꼬박 먹었더라면 역사를 살짝 뒤틀었을지 모를 곽가였지만 놀랍게도 역사록들을 아무리 뒤적여도 그가 병법이나 전술관련 제안을 한 기록이 없다. 쉽게 말해 전장에서 용병술이나 전쟁 또는 세력다툼 속에서 승기를 잡을 병략을 짰다는 증거가 없다는 거다. 이리저리 다 뒤져도 군사적인 공적은 삼국지정사에서 여포를 사로잡는 결정적 작전인 "하비성 수공"이 전부, 그나마도 단독입안 아닌 순유와 공동작전입안이다. 당시 조조 휘하에서 껌 좀 씹던 군사들로 순욱과 순유, 정욱 등이 있었는데, 삼국지정사를 분석하고 주석을 달았던 역사가 배송지의 평가에 의하면 이 중 전략전술적 재량이 가장 훌륭한 것은 순유였고 그 다음이 순욱, 그 아래가 정욱이라 했고 곽가는 그 정욱보다 못한 수준 이라고 평 했다. 삼국지연의에는 원소 VS 조조가 결전 벌인 관도대전 속 큰 활약을 한 듯 그리지만 사실 관도대전의 총참모장은 순유였다. 여포와의 대전에서도 주요 전술 입안자는 역시 순유, 게다가 비록 엘리에 가깝게 털리긴 했어도 당시의 기세가 등등하던 적벽대전 당시 조조군의 총참모장 역시 순유였다. 뭔가 쓰다보니 오늘의 주인공은 순유같다... 아무튼 의외로.... 매번 많은 분들에게 '곽가도 꼭 다뤄주세요!ㅎ'소리를 들을만한 뭔가가 없이 좀 부풀려진 인물이란 것이다. 그러나 역사 기록들 속의 곽가는 정말 조조의 총애를 받았고, 적벽대전 패전 후 조조가 봉효만 있었다면...T-T 이라며 오열했다는 것도 실제였다. 위의 언급대로 딱히 한 것도 없는 주제에 심지어 일찍 죽기까지 했던 먹튀라면 결코 절대 조조의 사랑을 받지 못 했을 것인데 어찌 그는 깐깐쟁이 조조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 일단, 그는 달변이였던 걸로 보여진다. 그리고 역사서들 속의 그의 가장 대단했던 점은 "놀라울만큼 감이 좋았다"는 점이다. 그는 조조세력의 숱한 중대사들 앞두고 거의 확정에 가까운 예측들을 내놓았고 "모두" 맞았었다. 더더 놀라운 것은 그런 예측들은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과 반대되는 의견인 경우가 많았고 더더더 놀라운 점은 그런 나름 날고 기는 이들과 반대되는 예측을 던지는 주제에 그리 확실한 근거조차 내지 않고 그냥 말빨로 덮었다는 점이다. 더더더더 놀라운 사실은 심지어 조조가..... 나머지 책사들과 혼자 딴소리를, 그것도 별 근거도 없이 그냥 '아, 내 말이 맞으니 그냥 나 믿고 해보삼'에 가깝던 곽가의 의견을 잘 따라줬다는 것..ㅎㅎ 조조가 여포를 정벌하고는 싶으나 근거지를 비운 틈타 원소의 후방공격을 걱정할 때도 곽가는 별 다른 논거를 제시않고 원소는 절대 내려오지 않으니 여포공격을 해도 괜찮다며... 여포공략이 순조롭지 않아 전황이 루즈해지며 다시 조조가 그 상황 지켜보다 원소가 쳐내려오는건 아닌지 걱정할 때도 역시 별 근거는 대지 않고 그냥 더 해보자는 제안을 했지만 모두 맞았다. 원소와의 전쟁을 앞두고 당시 남쪽의 야망가이던 손책의 후방 공격을 걱정하던 조조에게 손책은 분명 암살 당할 거라는 구체적 예측까지 맞춰버리며 사실상, 책사를 넘어 예언가에 가까운 그였다고.., Ex.) 당시 조조 책사들의 성향을 표현하자면.. 조조 : 나 로또 샀는데, 1등 되면 좋겠다..T-T 순유 로또의 1등 확률은 840만분의 1입니다. 게다가 1인 하루 최대 구매액은 10만원에 불과.. 제가 조사해보니 로또 1등 명당은 광화문역 3번 출구 쪽의 가판대던데 주공의 구매처는 지금껏 단 한 번, 4등 당첨이 전부였기에 매우 힘들 것이옵니다... 순욱 로또 1등은 하늘이 내는 것이니 안되더라도 너무 심려치 마시고 차근차근 꾸준히 구매를 하시다보면 언젠가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1등도 좋으나 그러다보면 더 확률 높은 2등이나 3등에 여러 번 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생각되옵니다. 정욱 참. 다들 복잡하게들 산다...ㅎㅎ 로또 1등도 결국 당첨금 때문에 되고 싶은건데, 주군! 돈 필요하시면 될 때까지 로또 사는것보다 차라리 병사들을 동원해 은행을 털죠? 곽가 다음주에 1등 될거임. 나만 믿으셈. 열전 및 정사와 배송지의 평가 및 주석 등을 참고할 때... 이룬 것 없음에도 조조의 총애를 받은 이유는 그가 조조와 생각하는 패턴이 비슷했기에 그랬던게 아닌가 학자들은 추측한다. 아무리 조조가 날고 기어도, 한 조직을 이끄는 수장이라면 마냥 자기 뜻대로 할 수가 없으며, 부하들의 의견을 듣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은 우로 가고 싶으나 대부분의 측근들이 좌로 가야한다며 저마다의 근거와 논거를 제시하면 그럼에도 이를 무시하고 자기 뜻을 내세우기는 참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조 자신도 전략전술 및 병법과 고서에 밝기는 했지만 그런 조조의 신뢰를 받던 휘하의 모사들도 머리만 쓰는 것으로는 결코 조조에 못지 않았고 그런 그들이 나름 그럴듯한 이유를 첨부하여 조조의 뜻과 다른 길을 다같이 이야기 한다면 따르자니 자신의 예측과 달라 마음이 놓이지 않고, 안그러자니 자신을 독선적으로 볼 측근들이 신경 쓰이는 딜레마 속에, 조조의 의견에 동조하거나 또는 조조의 속을 뚫어보듯 조조의 가려운 곳을 긁는 소리를 달변에 실어 확신에 차 우겨주는 곽가가 조조입장에서는 고마웠을 것이다. 게다가 곽가는 한실의 부흥이나 천하의 대세, 정의, 이런 건 관심 없었고 오직 자신을 알아주고 인정하는 주군인 조조의 상승만을 추구했다. 그런만큼 매사에 철저히 조조의 관점과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말했으며 조조에 대한 충성도 높았다. 조조는 비범하고 자신과 일맥상통하며 충성심 깊고 무엇보다 "젊은" 그에게 자신의 다음 세대와 후사를 맡기고 싶어했다. 쉽게 말해, 조조에게 곽가란 유비에 있어 제갈량에 비견되는 위치였다. 조조가 평생 겪은 휘하 대표 전략가들을 살펴보면... 순유는 자신의 출세와 성공에 포커스가 큰 사람, 순욱은 자신보다 한실의 부흥이란 대의를 중시하는 이, 정욱은 세간의 평가는 개의치 않는 독한 술수를 거침없이 계획하는 인물이였으며, 사마의는 마치 자신을 보는 듯한 야망과 음모가 느껴지는 자였다. 오직 곽가만이 자신만을 위해줬고, 자신의 편이였으며 자신을 가장 잘 따랐다. 그런 곽가가 앓다 끝내 병사하자 조조는 통곡을 했고 종종 힘든 난관마다 곽가를 떠올리며 그리워 했다고 역사기록에 남겨져 있다. 유비와 비교해보면... 유비의 조직은 서촉진출 전까지는 주로 인정과 의리가 주요하던 "의협집단"에 가까운 조직이였다. 지도자 이하 각 구성원들이 단순한 이해관계나 주종관계 이상의 끈끈함으로 뭉쳐져 있어 이탈률은 적으나 그런만큼 능력있는 신규진입자의 성장이 쉽지 않다. 하지만 조조의 조직은 비교적 세력의 초창기부터 일절 연줄없는 외부인의 영입에 적극적이였고, 그런 그들이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철저히 능력중심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언뜻 조조의 조직이 유비의 그것보다 현대적이고 실용적이여 보이지만 그만큼 조조조직의 분위기는 유비조직의 분위기에 비해 차가울 수 밖에 없다. 유비 휘하의 관우, 장비, 조운, 제갈량 등은 어지간히 큰 실책을 해도 큰 벌을 받거나 좌천될 걱정 없지만 조조 휘하의 문무장들은 큰 실책 시, 좌천과 징벌이 따르고 그에 따라 상하관계가 역전되는 일도 흔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조의 첫 거병 때부터 조조를 따라 숱한 생사고비 넘겼으나 후에 영입된 장료가 더 인정받아, 결국 장료에게 지위역전 당한 악진, 조조의 원정마다 확실한 후방보급으로 조조가 안심하고 전력투구하게끔한 선봉장 못지 않은 공적이 숱함에도 조조에게 밉보인 후 끝내 자살을 강요받아 죽은 순욱 등.... 그런 살벌한 분위기의 조직에서 역시 지도자인들 쉽사리 자기 속내를 드러내기도 쉽잖았을 것이고, 그런 무섭고 엄한 지도자에게 선뜻 다가가는 이도 많지 않았을 것임에도.... 조조에게 곽가는 자기 속내를 알아주고 다가와주는 고마운 존재요, 자기 의견에 부스터를 달아주는 미더운 인물이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딱히 눈에 보이는 성과가 몇 없음에도 곽가는 조조의 사랑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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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제작비 대비 폭망 성적 거둔 명작 10편

<오즈의 마법사> <시민 케인> <현기증>의 공통점은 뭘까? 시대를 대표하는 명작. 그 앞에 수식어도 하나 붙는다. 바로 ‘박스오피스 폭망’이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회자되는 작품들이지만, 이들은 개봉 당시 박스오피스에서 참패의 성적을 거뒀다. 이처럼 명성과 정반대로 낮은 박스오피스 흥행 수익을 기록한 비운의 명작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 300만 달러 (약 34억 원 흑자) <쇼생크 탈출> 제작비 $25,000,000 | 북미 흥행 수익 $28,000,000 맛보기 작품부터 소개한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유독 사랑받는 작품 <쇼생크 탈출>은 제67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을 비롯해 무려 7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던 명작이다. 2500만 달러의 제작비로 탄생한 이 작품은 북미 극장가에서 280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기록했다. 제작비보다 300만 달러를 더 벌어들이며 체면 치레는 했지만, 명성에 비하면 다소 평범한 흥행 성적이 아닐 수 없다. - 42만 달러 (약 4억 7천만 원 적자) <블레이드 러너> 제작비 $28,000,000 (추정) | 북미 흥행 수익 $27,580,000 ‘저주받은 걸작’을 언급하며 <블레이드 러너>를 빼놓을 수 없다. 개봉 당시 난해하다는 이유로 평단과 관객의 악평에 시달리며 리들리 스콧의 망작으로 손꼽혔던 <블레이드 러너>는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재평가되며 SF 장르의 명작으로 거듭났다. 개봉 당시 <블레이드 러너>가 거둔 흥행 수익은 2758만 달러. 제작비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다. 개봉 이후 <블레이드 러너>는 재개봉, 감독의 재편집을 통해 나온 최종판 ‘파이널 컷’의 개봉을 통해 약 50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더 거둬들였다. - 778만 달러 (약 87억 원 적자) <멀홀랜드 드라이브> 제작비 $15,000,000 (추정) | 북미 흥행 수익 $7,220,000 공개 당시 평단의 극찬을 받았으나 관객에겐 외면당했던 작품. 데이빗 린치 감독은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통해 제54회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해석의 여지가 너무 풍부한 전개가 독이 된 걸까? 같은 해 극장에 걸린 이 작품은 제작비의 반에도 못 미치는 흥행 수익을 기록하고 만다. 누군가에겐 명작, 누군가에겐 괴작으로 기억되었을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2016년,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100선 중 1위에 꼽히며 시네필들의 필수 관람작이 됐다. - 931만 달러 (약 105억 원 적자) <아이즈 와이드 셧> 제작비 $65,000,000 | 북미 흥행 수익 $55,690,000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이자 그가 스스로 꼽은 자신의 최고작 <아이즈 와이드 셧>은 큐브릭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미국 시장 내 적자를 기록한 작품이다. 현실과 환각의 경계선이 불분명한 데다 그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몽롱한 전개 방식이 대중들에겐 영 불친절했던 것. 북미에선 혹평을 받았으나,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이라는 사실,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의 스타 캐스팅이 힘을 더해 1억 달러가 넘는 해외 수익을 기록하며 손익 분기점을 넘기는 데 성공했다. - 2,139만 달러 (약 241억 원 적자) <A.I.> 제작비 $100,000,000 | 북미 흥행 수익 $78,610,000 스탠리 큐브릭의 구상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연출력이 만나 탄생한 걸작 역시 만족스러운 흥행 성적을 거두지 못했던 작품 중 한편이다. 1억 달러의 예산으로 제작된 는 북미 시장에서 7861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거둬들였다. 당시 관객 절반 이상이 “영화의 결말 부분은 사족이다”란 평과 함께 “스티븐 스필버그가 스탠리 큐브릭의 프로젝트를 망쳤다”는 혹평을 남겼으나, 후에 영화의 결말은 스탠리 큐브릭이 구상했던 내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 2,597만 달러 (약 293억 원 적자) <파이트 클럽> 제작비 $63,000,000 | 북미 흥행 수익 $37,030,000 브래드 피트의 풋풋한 모습을 담고 있는 데이빗 핀처 감독의 명작 <파이트 클럽> 역시 흥행 망작이다. 혹평과 호평이 극단적으로 갈리며 제작비 절반을 겨우 넘긴 370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기록했고, 영화의 흥행 부진으로 배급을 맡았던 20세기 폭스의 사장이 사임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문제작으로 떠오른 <파이트 클럽>이 빛을 발한 곳은 2차 시장. 압도적으로 높은 DVD·비디오 판매량을 기록했고, 이후 수많은 관객의 끊임없는 재평가 과정을 거친 끝에 현재는 많은 이들의 인생 영화로 자리 잡았다. - 4,100만 달러 (약 463억 원 적자) <칠드런 오브 맨> 제작비 $76,000,000 | 북미 흥행 수익 $35,000,000 현재 <로마>로 전 세계 시상식의 트로피를 휩쓸고 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에게도 흥행 참패의 쓴맛을 본 시절이 있었다. <칠드런 오브 맨>은 개봉 당시 제작비의 반에도 못 미치는 북미 흥행 수익을 기록했다. 해외 시장에선 그보다 적은 흥행 수익을 기록했다. 클라이브 오웬, 줄리안 무어, 마이클 케인, 치웨텔 에지오포 등 탄탄한 배우들이 한 데 모인 작품이 이렇게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 이후 다수의 작품의 제작과 기획을 맡아온 알폰소 쿠아론은 7년 뒤 <그래비티>를 들고 나타나 전 세계 시상식의 트로피를 휩쓸었다. - 4,685만 달러 (약 529억 원 적자) <아이언 자이언트> 제작비 $70,000,000 | 북미 흥행 수익 $23,150,000 애니메이션 장르의 대표적인 저주받은 걸작. <아이언 자이언트>는 <인크레더블> 시리즈, <라따뚜이>,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 등을 연출한 브래드 버드 감독의 데뷔작이다. 개봉 당시 평단의 호평을 얻었으나, 북미 극장가에선 제작비의 30% 수준인 2315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거두는 데 그치고 말았다. 덕분에 제작사였던 워너 브러더스 애니메이션이 한동안 휘청였다는 후문. 소리 없는 명작이었던 <아이언 자이언트>는 비디오와 케이블 TV를 통해 수많은 관객에게 사랑받았고, 개봉 이후에서야 명작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 6,100만 달러 (약 688억 원 적자) <인사이더> 제작비 $90,000,000 | 북미 흥행 수익 $29,000,000 거대 기업 내부 고발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사이더>는 관객과 평단 모두의 입맛을 사로잡은 명작이다. 마이클 만 감독 아래 알 파치노, 러셀 크로우, 크리스토퍼 플러머 등 연기파 배우들이 총집합한 이 작품은 아카데미를 비롯해 전 세계 유수 시상식의 수많은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이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초라한 흥행 성적을 지녔다는 점이 아쉬울 뿐. <인사이더>는 제작비의 1/3에도 못 미치는 북미 흥행 수익을 기록했다. 월드와이드 시장에선 총합 약 6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제작비의 2/3을 회수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 7,614만 달러 (약 859억 원 적자) <휴고> 제작비 $150,000,000 (추정) | 북미 흥행 수익 $73,860,000 조르주 멜리에스에게 바치는 마틴 스콜세지의 찬사. 마틴 스콜세지와 3D 촬영 기법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았던 <휴고>는 제84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11개 부문에 이름을 올리고, 5개 부문에서 수상하며 그해 최다 후보작, 최다수상작으로 선정되며 제 작품성을 입증해냈다. 흥행 수익이 높지 않아 보이는 건 어마어마한 제작비 덕분일 터. 북미 극장가에서 <휴고>는 제작비 1억 5천만 달러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흥행 수익을 기록했다. 해외 시장에서 벌어들인 흥행 수익은 약 1억 1천만 달러. 제작비에 비해 아쉬운 흥행 수익임은 분명해 보인다. 출처ㅣ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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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⑥/가부키와 주신구라

이훈구 시나리오 작가가 재팬올에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을 연재 중입니다. 미국 LA에 거주하는 작가는 ‘영화란 무엇인가?’의 저자이자 영화사 (주)라인앤지인 대표입니다. 홍콩킹라이언필름(KING LION HONGKONG FILM)을 설립해 중화권 콘텐츠 수입과 제작도 하는 작가는 중국, 일본 등 아시아권 영화와 문화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편집자주> 처음 ‘영화’는 일본에서 이류예술로 치부하는 경향이 많았다. 가부키 배우들 역시 일류 예능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명맥을 유지해 왔기에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초 프랑스 영화가 문학, 이탈리아 영화가 오페라, 미국 영화가 ‘구체적인 시스템’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면 일본 영화는 결국 일본의 4대 예술인 전통 가면극 노(能), 막간에 상연하는 희극 교겐(狂言), 인형극인 분라쿠(文楽, 人形浄瑠璃) 중 가장 으뜸이라 할 가부키가 기반이 되었다. 에도시대의 서민(町人)문화로 자리 잡았던 가부키는 일종의 음악극이면서 장인(匠人)다운 예(芸)를 연마한 종합예술이었다. 영화가 비록 전통극에 뿌리를 두기는 하지만, 가부키 예능인들이 볼 때 영화는 ‘흙탕 속의 연극(일명 도로시바이, 泥芝居)’에 불과했다. 따라서 배우들의 참여는 전무했다. 1897년 뤼미에르 형제사(社)의 두 촬영기사인 가브리엘 베이르(Gabriel Veyre)와 콩스탕 지렐 Constant Jirel)이 일본에 도착하여 당시 전무후무한 영화 딜러(concessionnaire)였던 이나바타 가쓰타로(畑勝太)와 합작으로 도쿄, 오사카, 교토, 고베에서 여러 편의 거리 풍경 영화(훗날 필름들이 재발견, 복구 되어 1995년 일본 영화 100주년 기념행사 때 상영됨)들을 찍었다. 이어 일본 스텝들을 중심으로 도쿄 화류계에서 ‘게이샤의 춤’을 촬영했지만 1898년에 가서야 비로서 가부키가 영화적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시바타 쓰케미치가 배우인 ‘9대 이치카와 단주로’(市川團十郎)와 ‘5대 오노에 기쿠고로’(尾上菊五郎)의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 ‘단풍 구경’이라는 가부키 작품을 촬영한 것이다. 가부키를 영화적 소재로 삼은 데에는 몇 가지 상업적 고려도 있었다. 영화가 일본에 정착된 이후에도 관객 대부분이 어린이들 혹은 저학력 노동자들이었고, 지식인들은 이러한 ‘하급예술’인 영화관을 찾는 것을 꺼렸다. 또한 시스템을 처음부터 구축한 할리우드과 달리 일본은 ‘마키노’(牧野: 마키노 쇼조 가족으로 구성된 영화 제작자, 감독, 배우의 집안) 영화와 같이 가내수공업적인 영화들도 많았기 때문에 가부키는 가장 좋은 소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부키가 남자 배우들만이 등장하는 장르였고 여자 역할을 하는 남자배우인 ‘온나가타’(女形)가 전통적으로 여자역할을 연기해 왔기 때문에 1920년대 초반에서야 여자배우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가부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은 ‘주신구라(忠臣蔵)’다. 일본 에도 시대에 벌어진 무사들의 복수 학살극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제작 되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1748년 만들어진 분라쿠 인형극을 가부키로 만들었는데 이를 다시 스크린으로 옮긴 것이 영화 ‘주신구라’다.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浅野長矩)의 억울한 죽음을 복수하는 47명의 무사(浪人, Ronin)들의 얘기다. 80편 이상이 만들어졌는데 1912년을 기점으로 다음과 같은 작품이 있다. ᐅ‘일본 영화의 아버지’ 마키노 쇼조(牧野省三)가 1919년과 1928년 두 차례 제작. ᐅ기누가사 데이노스케(衣笠貞之助: 영화 ‘지옥문<地獄門>’으로 ... (이어지는 기사 더보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14)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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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 승조 (陳壽 承祚) A.D.233 ~ 297

어찌보면... 이 칼럼을 시작하며 가장 먼저 다뤘어야 할 사실상 삼국지의 가장 중요인물을 이제서야 다루게 되니,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삼국지정사(三國志正史)의 저자 "진수"다. 사실, 수천 여 년 이상을 자랑하는 유구한 중국문명.. 심지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와 함께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인 중국의 역사는 여간 장대한게 아니며 그 중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후한 말 ~ 삼국시대는 고작 한 세기 밖에 안되는.. 이리 말하면 좀 뭐하지만, 말 그대로 "찰나" 에 불과하다. 그런 찰나의 순간(...)을 중국 본토는 물론 타이완과 동남아시아 및 중화권을 넘어 여기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길고 긴 중국역사 중 가장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시기이자 큰 인기와 관심을 얻게 된 시대로 만들어 낸 것의 시작은 바로 진수의 공적인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토 다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 뭔 개소리여, 삼국지는 나관중이지! ' ' 난 이문열꺼만 봤구만 뭔 소리? ' ' 오레노산코쿠지와요코야마미쓰테루상노산코쿠지데스 ' 다 맞다. 모두 옳다. 무엇보다 오늘날 대인기의 삼국지가 있게 된 가장 큰 공은 누가 뭐래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저자인 "나관중(羅貫中)" 및 나관중 이전에 삼국지정사의 부족하거나 아쉬운 부분들을 연구하여 주석을 달았던 "배송지(裴松之)", 그 밖에도 현대에 와서 이를 바탕으로 한중일 삼국에서 평역본과 흥미로운 미디어믹스들을 양산해낸 많은 이들이 오늘의 삼국지가 누리는 인기와 명성을 있게 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연계물들 역시 애초에 진수가 삼국지를 집필하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였다. 참고로 삼국지정사는 나관중의 연의가 창작되고 이게 또 인기대폭발하며 아주아주 근래에 그리 일컫는거지, 지금도 중국에 가서 '삼국지'라 하면 그냥 정사를 말하며 삼국지연의만 따로 연의라고 한다. 이는 마치 짜장면과 짜파게티를 구분할 때 짜장면을 가리켜 굳이 '정통짜장면'이라 안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정사는 말 그대로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엮은 거라 제법 많은 편수로 이루어져 있고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에 각 서들은 여러 인물들 위주의 열전들로 구성되어 있다. 연의만 줄기차게 읽다 환상을 품고 접하면 그야말로 모든 불면증을 치료할만큼 노잼.. 아니, 핵노잼이다. (일단 구해보기조차 버겁다..,) 다시 진수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그는 당시로는 파서군(巴西郡) 안한면(安漢縣) 출신이며 오늘날 중국 쓰촨성의 난충 시에서 북쪽으로 50~60km가량 더 가면 그쯤이 대략 진수의 고향 위치다. 참고로 이 동네는 중국내에서 일조량이 매우 적은 곳 중 하나인데, 여름 기준으로 오전 8시쯤 일출, 오후 5시쯤이면 일몰로 어둑어둑하다고 한다. 구글링 해보니 이 동네 5성급 호텔 일반객실의 평균가가 우리돈 ₩ 50,000. 쯤이라는데 매우 싸다! 내가 예전 여친과 자주 가던 캘리포니아모텔의 1박이 ₩ 40,000. 주말 피크타임에 가서 일반실 없다고하면 어쩔 수 없이 가는 디럭스룸이 ₩ 50,000.이였는데... 대신 디럭스룸은 일회용품을 그냥 줘서 실제로는 ₩ 9,000. 더 비싼 셈이다. 여튼 진수의 고향을 보면 알겠지만 촉한(蜀漢)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제법 학문에 밝았다고 하며 그 덕에 초주의 휘하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렇다고 초주가 1:1 과외를 해준 건 아닐거고 당시 트렌드상, 아마 초주가 가르치는 여러 문하생들 중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지연의나 코에이의 게임에서 잉여노쓸모로 나와 그렇지, 초주는 촉한의 당대최고의 학자들 중 한 명이였고 명성이 대단했기에 그런 초주의 문하생은 아무나 될 수 없었다. 참고로 초주는 "도참설(圖讖說)" 이라는 일종의 예언과 관련된 이론의 신봉자인 촉한판 노스트라다무스였다..;;; 본인도 똘망진데다 스승인 초주빨이 겹쳐 꽤 일찍 벼슬에 나섰지만 원래 책만 후비는 애들이 대개 그렇듯, 사회생활은 잘 못 했는지... 당시 실세였던 환관 황호를 비방하는 상소를 올리다 좌천 세 번에 파면 한 번을 먹었다. 보드게임 하다 주사위 잘못 던지면 "처음으로 돌아가시오" 이런거 여러 번 걸리는거랑 비슷한 사회생활을 했다..... 내내 이렇듯 정권실세에게 개김질 하다 파면크리 먹고 백수생활 하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한량처럼 살 때 촉한은 위나라가 낳은 클리프행어 등애의 손에 멸국을 맞고 검각에서 버티던 강유마저 종회에게 항복하며 진수는 집에서 노는 사이, 국적이 촉한에서 위로 바뀐다. 그리고 여전히 노는 동안 사마염이 위를 멸망시키고 진을 건국하며 백수진수의 국적은 위에서 진으로 또 한 번 바뀐다. 이런 복잡한 귀화사를 가진 진수는 진사람이 되서야 장화라는 한 문관이 한 때 꽤 날렸던 그의 학문을 아까워해 천거해주며 다시 벼슬아치로 재취업에 성공한다. 솔직히... 인성 자체는 그닥이였던 듯 싶다. 촉한시절 임관동기였던 자와 술자리 계산문제로 다툰 후 원수지간 되었는데 진수가 재임관 후 마침 그 자도 다른 이의 천거로 다시 벼슬에 나오려는걸 진수가 혼신의 뒤끝으로 막았고... 당시 촉한출신 벼슬아치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들 모두 진수와 사이가 다들 별로였다. 꼭 그렇다고 어디 나와 있는건 아니지만.. 아마도 진수는 저런 직장내 왕따도 당하고, 별 다른 공적이 없으니 인사고과가 별로라 승진도 잘 안되어 그랬는지... 그 후부터 촉한의 이런저런 자료와 기록들을 모으고 엮어서 역사서 저술이라는 히키코모리나 해낼 법한 일을 해내고 이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오늘날... 여러분과 내가 좋아하는 삼국지가 된다! T-T 진수가 만약 직장동료들과 막 사이 원만하고 일도 열라 잘 해서 제갈량처럼 온갖 거 다 떠맡고 그랬으면 그렇게 한가롭게 자료 모아서 역사서 만들 생각도 안했을거고 여유도 없었을거다. 물론 진수 본인의 삶이야 한결 업그레이드 되었겠지만 그야 내알바 아니고, 따당하는 일못인 덕에 우리가 오늘도 삼국지를 볼 수 있는 것. 물론, 내가 반 년이나 쉬다 이제 와서 다시 이 칼럼을 연재하는 이유가 결코 직장내 왕따 및 인사고과 하위자여서가 아님을 명시한다. 이렇듯, 인성이 별로인 진수의 삼국지는 그야말로 대박을 친다. 한창 위와 촉의 기록을 모으던 터에 마지막으로 발악하던 오나라까지 망하며, 거기서 유입된 오출신 학자들과 공동으로 오의 역사기록들까지 합쳐 엮으며 삼국지는 완전체가 되었고 보통 당시에는 인정 못 받는 경우가 많음에도 진수의 삼국지는 이미 당대에도 여러 학자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본인도 내 길은 이거다 싶었는지 더욱 삼국지 편찬에 집중... 심지어 본인을 재임관 하도록 추천해준 장화가 다시 더 높은 직위에 천거하자 장화의 반대파에서 태클이 들어왔는데, 진수는 그걸 핑계 삼아 승진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실 무렵 반대파의 집요한 태클에 또 다시 파면 당하여 백수가 되고 만다. 허나 그간 정력을 다해 삼국지를 짓고 또 어머니도 여의고 게다가 정치적인 태클도 워낙 심히 받다 기어이 파면까지 되며 그가 받은 스트레스도 적잖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결국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안되어 본인도 병을 얻고 사망하고 만다..... 그가 죽자, 그가 지은 삼국지를 읽었던 학자와 고위관리들은 그와 그 책을 잊지 못하여 당시 천자에게 상서를 올려 진수가 지은 삼국지가 겁나 명작이니 그냥 저렇게 없어지는건 아니될 말이라며 애원했고 이에 천자도 사람들을 진수의 집으로 보내 이들로 하여금 인간복사기가 되라는 어명을 내려 이렇게 수작업으로 베껴진 삼국지는 세상의 빛을 본다. 위에서 말했듯 그 분량이 대단하지만.... 근 100년의 역사를 엮은 것치고는 간소한 부분도 많았다. 그런 아쉬움에 훗날 송나라의 3대 황제인 유의륭이 부족한 부분을 좀 더 기록과 자료 및 민담 등을 걸러 주석을 달게 하였으니 이 때 주석을 달았던 것이 배송지다. 일부 떠도는 소문에... 제갈량에게 처형 당한 촉한의 장수인 진식이 진수의 부친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픽션! 그냥 픽션도 아니고 개픽션!! 저 진수가 지은 삼국지정사에 의하면 진식은 3차 북벌 당시 참전했다는 기록 이후로는 등장이 없다. 그리고 연의에서 진식이 처형되는 4차 북벌 자체가 나관중이 지어낸 뻥인데다, 그 연의가 맞다셈쳐도 연의 속 진식의 사망시점이 230년이니... 233년생인 진수가 3년 전 사망한 진식의 아들이 되는 방법은 현대에서나 가능한 냉동정자보관 기술만이 정답이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그 긴 시간 피나는 노력과 정성으로 온갖 자료들을 끌어모아 역사서를 저술하는데 자기 부친의 기록만 하필 부실한 것도 말이 안된다. 여튼 그가 촉한출신에 위를 거쳐 진의 신하가 된 관계로 당시부터도 명서라는 호평과는 별개로 기록의 공정성에 대한 논란 및 이에 대한 가십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서에 좋은 기록으로 넣어줄테니 뇌물을 요구했다던가 (그런데 이건 나였으면 진짜 이랬을 듯.ㅎㅎㅎ) 사마가문에 대한 비판이 유독 없다거나 등등... 특히 이 사마가문의 비판관련 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애초에 진수도 결국 사람인지라 현 정권의 시초 및 그 가문 사람을 객관성있게 표현할 깡은 없었다는 주장과 또 하나는 위에 진수 사망 후 인간복사기들이 가서 진수가 쓴 삼국지를 베끼는 과정에서 누락 시켰다는 주장이다. 뭐 그런데 이건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이니.. 혹여 독자분들 중 근시일내로 안타깝게 운명하시는 분이 저승가서 진수를 만나거든 물어본 후 내 꿈에 나타나서 알려 주시기로 하자. 여튼 당시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의 출신이나 정치성향에 따라 어땠는지는 모르나 현대에 와서는 그의 저술방향에 있어 두드러지는 편향성은 거의 없다고 평가 받고 있다. . . . 가장 마지막이 7월 2일에 올린 노숙편이니 그날부터 거의 만 반 년만에 올리네요...ㅎㅎ (하필 컴백편 주인공이 노잼 진수...;;;) 제가 4월에 이직을 했는데, 새 회사가 제가 지금껏 살며 다닌 그 어떤 회사들보다 일이 더 많고 어렵네요.. 맨날 일에 치이다 집 와서도 일하고 새벽 3~4시에 자고 제가 사이버대학에 등록해 공부 중인데 그것도 벅차고 가장 큰 이유는 빙글의 인터페이스가 제 입장에서는 좀 직관적이지 않고 불편하더라구요.,.. 사실 여러 번 썼다 말았다를 반복 했었어요. 그렇게 저도 삶에 치여 잊고 살았는데, 간간히 뜨는 알림에 들여다 보면 꽤 긴 시간 놓고 있음에도 저와 제 글을 잊지 않아 주시고 돌아오라는 기다린다는 댓글 남겨 주시는 분들의 댓글을 보며 완전 진짜 마음 울컥 했습니다....T-T 제 바쁜 삶이 달라지진 않다보니 꾸준한 연재는 약속 드릴 수 없지만(뭐 이건 전에도 그러긴 했죠ㅋ) 그래도 텀이 길지언정, 예전처럼 많은 분들이 봐주시지 않는다해도 연재는 계속 해나가겠습니다. 사실 이 6개월도 제가 글을 안쓰겠다 마음 먹은 건 아니였고 어쩌다 저쩌다보니 진짜 시간이 쏜살처럼 간거예요ㅋ 아무튼 이제 솔크도 지났고 곧 새해니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날 추우니 감기들 조심하세요! 그리고 본의 아니게 긴 휴재에 대해 사과 드리며 그럼에도 여태 기다려 주신, 그리고 다시 돌아와 읽어 주신 분들께 깊은 고마움을 표합니다. 제 글 때문에 빙글 안지운다는 분들과 돌아오라고 언제까지고 기다리겠다는 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어차피 노총각이라 주말에 시간이 남으니 최대한 빨리 연재 해보려 노력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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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견 문대 (孫堅 文臺) A.D.155? ~ 191?

중국의 삼국시대를 구성하는 위, 촉, 오 중의 하나요.. 위, 촉, 오 중 가장 마지막에 망한 오나라의 황실이던 손가의 시작에는 이 남자가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손가의 제네시스라 할 수 있는 "손견"이다. 여기저기에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중국 춘추시대의 위대한 병략가인 '손무(孫武)'의 후예'라는 소문과 추측까지 났지만 일절 그 실제는 확인된 바가 없는 그저 루머에 불과하다. 물론, 절대 아니란 증거도 없지만 유비가 한황실의 종친이라는 사실처럼 족보를 뒤져 팩트를 입증한 것이 아닌 본인의 자칭이며 또 이를 갖고 삼국지정사의 저자인 진수 또한 정황상의 추측을 한 것에 불과하다. 양주 오군 부춘현이 고향이며 오늘날 중국의 최대도시인 '상하이(上海)' 인근쯤이다. 물론, 저 당시의 오군은 이미 전한시대를 넘어 진나라 때부터 살기 괜찮은 지역이였고, "항우"도 거점 삼았던 인구도 적잖던 곳이긴 하지만 당연하게도 지금의 상하이와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유의해두자. 전반적인 사료들 및 역사서와 그 주석본들, 열전까지 죄다 뒤적여 추론해 볼 때... 양주지역의 제법 좀 사는 "호족집안 아들"이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고 또 대대손손 유구한 금수저까진 아닌거 같고, 후한 말에 이르러 떠오른.. 러시아의 올리가르히같은 그런 신흥세력의 자제였다. 어릴 때부터 이미 살던 동네와 고향 일대에서 먹어주는 깡다구와 대담함을 지닌 싹수 다른 소년이였으며, 만 17세에, 모여있는 수적떼들에게 홀로 덤벼 그들을 쫓아내 와해시킨 일화가 있고, 이걸 계기로 벼슬길에 나가 무관이 되어 같은 해 회계군의 허창 & 허소의 난을 제압한다. 이때부터 손견은 고속승진을 시작했다. 참고로 손견이 잘 나가는 호족집안임을 입증해 주는 한 예가 바로 위의 저 허씨들의 난을 제압코자 모병하는 과정이였는데, 관군만으로는 전력이 부족하다 판단.. 사재를 털어 1천 여명의 병력을 추가로 모병하여 임무를 완수했다는 점이다. 당장 천 여명을 모병하고.. 그렇게 모집된 인원들을 무장 및 최소한의 복색을 통일시켜 먹이고 재우고 훈련하는데 투자되는 비용이 벌써 보통이 아니다. 아무튼 놀라운건 손견이 저런 히어로급 활약을 올렸던 연령이 고작 겨우 열 일곱 가량(추정) 나이였다는 것인데, 아무리 저 시절이 평균수명, 사망연령이 낮디 낮아 일찍일찍 결혼하고 얼른얼른 성인대우를 받았던 시절임을 감안해도 참 대단함이... 당장 나도 그렇고, 여러분들이 열 일곱살 때 어땠는지 떠올려보면 바로 답 나온다. 담임선생님의 빠따 한 번에도 고통에 몸을 뒤틀고 쉬는 시간 벨이 울림과 동시에 매점으로 달려나가 빵 사먹으려고 버둥이던 우리의 그 나이에 손견은 홀로 수적떼를 목 베고, 벼슬도 오르고 군사를 모아 전투도 나갔던 것.. T-T 다만.. 어려서부터 아예 학문은 내려 놓았었던 듯. 책을 읽었다는 기록도 없고 심지어 문맹이였다는 설도 있다. 물론, 저 당시에 문맹률은 엄청나긴 했다지만, 그래도 나름 사는집 잘 나가던 자제로서 문맹설은 본인이 얼마나 학업을 멀리 했는지를 보여준다. 저 당시는 오로지 무예만 출중한 이들은 무시를 받았고 높은 직위에 오르는 데도 한계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의 클래스가 되는 무장들은 깊은 학식까진 아니여도 최소한 여러 권의 병략서, 병법서들을 읽는 수준은 되야했던 시절이였기에 문맹설이 돌 정도로 학문을 등한시한 점은 자랑할건 못 됨이 맞다. 허나 그런 무식함에도 불구하고 군사관련 행정처리에는 꽤나 빠삭하게 처리를 했었고 그런 일처리와 용맹 그리고 궂은일은 미루거나 피하지 않고 나서서 쓱싹 처리하는 빠릿함덕에 평판은 좋았던 편으로 성격은 좀 불같을 지언정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시원시원하면서도 화끈한 성격 덕분에 따르는 이들은 적잖았던 모양이다. 군율준수에 매우 엄하면서도 풀어줄 때는 풀어줬고, 병사들을 고압적인 자세 일변도가 아닌 "전우애"로서 대함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식사도 병사들과 함께 동일메뉴로 먹었다고 하니 당근 병사들의 충정도 높았다. 이래저래 빠른 출세가도 달리며 승승장구 했던 손견이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땅 넓고 사람 많은 중국의 어느 지역, 어느 군벌에나 두엇쯤은 있는 준재였던 그가 전국구로 발돋움하는 계기는 다 필요없고 바로바로 원소의 격문에 의해 집결한 18로 제후들의 유니온인 "반동탁연합군 VS 동탁군"과의 대립이였다. 참고로, 삼국지연의 속에는 마치 손견이 원소, 원술, 조조 등 당시 각자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참전한 여러 제후들과 역시 동등한 제후들 중 하나로 그려지는데 이는 왜곡이다. 그때까지도 손견은 독자적인 자신만의 세력을 이끌던 군벌이 아니였다. 이미 그전, '황건적의 난' 당시에는 엄연히 조정의 벼슬에 임관된 상태로 '주준'의 부장으로 참전, 그 후, 서량에서 184년에 변장 & 한수의 난 당시에는 십상시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것으로 밉보여 지휘관직을 박탈당한 '황보숭'의 후임으로 정벌군 사령관을 맡았던 '장온'의 부장으로 참전 하는 등... 주로 황실직속의 고위장군들의 부장으로 참전한 경우가 많았던 만년부장이였다 덧붙이자면... 변장 & 한수의 난 당시에는 서량에서 그 위명 높던 동탁도 장온의 천거로 참전한 상태였는데, 손견과는 여러 모로 행실과 견해의 차이로 몹시 사이가 안좋았던 터였고 손견과 달리, 상관인 장온에게도 불손하며 제멋대로에 안하무인으로 굴던 동탁이였기에 둘은 상극.. 게다가 서량에서는 먹어주던 동탁이 상당한 군공을 쌓았음에도 손견은 몇 차례 패전하는 등 재미를 못 봤다. 반동탁연합군에 합류했을 무렵도 당시의 위세가 천하에서도 세 손에 꼽히던 "원술"의 사실상 부장에 가까운 자리로 원술의 지시와 서포트를 받으며 참전했었다. 아무튼 하여간 그렇게 반동탁연합군 소속으로 참전한 손견은 그야말로 군계일학적인 대활약을 벌이며 동탁군을 양민학살하여 후한의 슈퍼스타로 발돋움 하는데... 일단 첫 타석에서는 접고 들어갔다. 동탁의 부장이던 '서영'과의 전투에서 박살이 나서 간신히 최측근의 호위병력 몇 십여 기만 이끌고 살아나왔고 그마져도 위급상황까지 몰려.... 자신의 한 팔과 다름없던 "조무"가 손견의 붉은 두건을 대신 쓰고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어준 덕에 겨우 살았다. 참고로, 삼국지연의에서 조무는 저렇게 손견을 살리고 간지 뿜으며 장렬히 전사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저 때 손견의 두건을 걸어놓고 적병들이 돌아갈 때까지 짱 박혀 있다가 살아남았다. 다만.... 그 이후로 정사에 더 기록이 없어서 어찌 되었는지는 알 길은 없다. 저 패배를 보약 삼아 그 다음부터 나선 손견은 다른 사람이 되어 동탁군을 거침없이 관광 태우기 시작한다. 동탁의 부장 '호진'의 군대를 엘리시키고, 무력의 화신이던 그 "여포"의 부대조차 지워버렸으며, 심지어 이 와중에 연의에서는 관우가 "데운 술이 식기 전에" 목을 베었다는 "화웅"도 참수한다. 솔직히 화웅이 연의에서 관우버프용 적장으로 나와서 동탁군의 에이스던 여포와 함께 원투펀치를 이루는 맹장으로 그려지지만 솔직히 정사나 그밖의 기록들에서는 별 다른 언급이 없어서 그 정도의 장수인지는 알 길이 없다. 허나 당시 화웅이 맡았던 임무나 직위등을 볼 때, 그렇다고 또 듣보잡은 결코 아니였음을 예상할 뿐! 결국 이런 손견의 크레이지 모드 탓에 동탁은 당시의 후한 수도이던 낙양을 죄다 초토화 시킨 후, 장안으로 천도를 하게 되며... 이 와중에 한 번 여포부대를 박살냈던 손견은 다시 한 번 낙양에서 여포부대를 짓이겼다. 이렇게 수복된 낙양성에 진입하며 손견이 옥새를 득템하게 되었고 그 옥새는 당시 손견의 주군이던 원술이 반협박을 하여 삥뜯기고 만다. 삼국지연의처럼 옥새를 꿍쳤다가 손책에게 물려주고 손책이 그 옥새를 담보삼아, 원술에게 병력을 인수받아 독립했다는 것도 삼국의 한 축을 맡는 손가의 라이프를 보다 드라마틱하게 만들고자 각색된 것이였다는...ㅎ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손견은 명백한 "원술의 부하"였다. 삼국지연의만 보셨거나 게임 등으로만 접하신 분들은 절대 몰랐을 사실이다. 허나 원술이 그럼 그렇지, 명군이 아니다보니 그 아래에서 손견이 이래저래 속앓이를 하긴 했다. 일단 저 동탁과의 전투에서도 파죽지세였지만... 손견이 너무 잘 나가, 그 위세나 명성이 높아지면 그를 컨트롤하기 벅찰 것을 염려하고 시기했던 원술이 겐세이를 놓고자 군량보급을 끊었던 탓에 손견은 그 드높던 기세가 주춤해질 수 밖에 없었고 위의 언급대로 옥새마져 협박으로 빼앗기며 심지어 그 아들 손책마져도 원술로 인한 스트레스가 여간 아니였다고 한다. 그 후.. 그 원술의 명으로 유표를 공격하던 중, 당시 손견에 맞선 유표측 장수인 "황조"의 부대와 전투 중, 원정군 총지휘관답지 않게 퇴각하는 황조를 직접 앞장서 추격하는 무리수를 두다 가뜩이나 눈에 잘 띄는 붉은 두건을 두른 탓에 빗발치는 화살과 돌에 맞아 젊은 나이에 허망히 생을 마감한다. 직접적인 사인은 날아온 돌에 머리를 직격으로 맞고 두개골의 골절에 의한 즉사. ... 손견 본인의 전투 스타일 자체가 겁대가리 상실하여 앞뒤 재고보고 할 거 없이 자신이 앞장서는 스타일. 심지어 공성전에서조차 자신이 앞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고 위에서 언급된, 손견을 전국구스타로 만들어준 동탁과의 전투에서도 그 잘났다는 18로 제후들 중 거의 유일하게 손견 혼자 동탁군 전군을 발랐을 당시 역시 가장 선두에서 미친 듯 싸웠던 손견이였다. 일기토기록이나 무예솜씨에 대한 언급은 따로 남아있는 자료가 없으나, 저렇게 밑도 끝도 없이 앞장 서서 날뛴걸 보면 결코 힘과 무예가 뒤쳐진 사람은 아닐 거라는 것은 기정사실. 저런 스타일은 뭔가 간지넘치고 상남자스러워 보이긴 해도 정말 크나큰 리스크를 안고 있는 '하이 리턴 & 하이 리스크' 타입이라 할 수 있다. 총지휘관이 후방에서 지령만 내리는 부대와 직접 장병들을 독려하며 자신이 선두에서 달려 나가는 부대의 사기 차이는 극명하다. 저 당시의 병사들은 딱히 긴 시간 제대로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 드물었고, 대개 필요시에 허겁지겁 긁어모은 농부들 출신이 대부분에 장비나 무기도 별 볼일 없었다. 우리가 삼국지관련 각종 미디어에서 보듯, 무슨 요새군대처럼 통일된 군복을 입은 것도 아니였다. 쉽게 말해 거의 오합지졸이였는데... 그런 병구성일수록 몹시 중요한 요소는 딱 두 가지! "병력의 수"와 "병력의 사기"이다. 헌데, 그 둘 중에도 더욱 중요한 것은 "사기"였다. 기세가 드높은 소수가 그렇지 못한 다수를 일방적으로 도륙하는 경우도 저 당시는 부지기수였고. 서양의 역사를 봐도 숫자가 많다고 볼 수 없던 로마군이 다수의 게르만족, 북아프리카에서 승리를 거둔 큰 이유는 잘 훈련되고 통제된 정예병들의 자신감에서 오는 결국은 "앞선 기세" 탓에, 상대들이 더 많은 수나 지리적 이점을 가졌음에도 오히려 기가 꺾인 탓이였다. 심지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는 그 무섭다는 '코끼리부대'를 앞세우고도 보병중심의 로마군에게 패했다. 이유는 카르타고는 코끼리를 앞세우고 나머지는 뒤로 배치, 코끼리가 짓밟고 휘저으면 나서서 시마이하는 전법인데, 로마군의 화살과 투창에 결국... 살로 이루어진 코끼리가 쓰러지면 그 후로는 대책이 없던 카르타고군은 기세가 꺾였기 때문. 아무튼 그렇다보니 저런 용감한 지휘관이 선두한 부대에, 겁을 먹는 장수나 병사가 있을리 만무하여 손견의 부대는 어지간한 적세력은 별 다른 전략없이도 죄다 씹어버렸던 것이다. 허나... 저 방식이 반대로 정말 극히 위험한 게.. 앞장 선 지휘관은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적병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고, 제아무리 무예가 뛰어난들... 절대 다수의 병력이 다구리를 놓으면 장사가 없고, 활같은 원거리무기에 대해서도 취약하며 또 언급했듯, 만에 하나 지휘관이 전사하면 그 중요한 기세가 꺾이기에.. 다수여도, 승세를 타고 있었어도,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어 패할 위험이 지배적이다. 게다가 저 방식의 장점덕에 열 번, 백 번 이긴들... 저 방식의 단점탓에 한 번 패하면.. 그 당장의 전투는 물론, 그 세력 자체의 존망이 걸리게 된다. 그렇기에 이미 진즉부터 손견의 측근들은 그의 무모한 선두돌격을 자중시켰으나 그때껏 멀쩡한 손견은 당연히 씹고 지고집대로 했고, 그러다 결국은 누가 어디서 던졌는지도 모를 돌팔매에 맞고 허망히 사망한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이러한 성향은 장남에게도 고스란히 유전된다는... 성격은 시원시원했던 모양이다. 처벌도, 용서도 화끈했고 철저한 행동파였다. 대개의 맹장들이 그렇듯, 성격이 불같고 급했으며 전략전술 등은 비겁한 꼼수로 생각하여 비중을 크게 두지 않았다고 한다. 물욕은 없으나 고집이 센 편이였고 대단히 헌신적(?)인 아버지로서 어느 정도 나이가 된 아들들은 전장에 늘 데리고 다니며 각종 군사전투관련 경험과 지식들을 쌓게끔 지도했고 무예도 직접 가르쳤다. 아내(오국태 부인)를 몹시 사랑했던 로맨티스트이기도 했는데, 낙양에서 얻은 옥새를 원술에게 바치게 된 이유가 바로 원술이 손견의 아내를 인질 삼았기 때문이였다. 물론, 현대의 기준으로 아내가 인질인데 그깟 도장은 당연히 포기하는게 맞는거 아니냐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여성인권은 지금과 비교불가인 거의 남성의 부록으로 여겨지던 때고 다른 인물들은 자신의 야망이나 위급시에 아내의 안위는 내팽개 친 경우가 부지기수에 심지어 아내가 여럿인 경우도 많았고 "옥새"는 그냥 열쇠도 같이 하는 도장집 가서 인감으로 쓸 거니까 소뿔로 파달라며 3만원 주고 잠깐 기다리면 도장아저씨가 돋보기끼고 레이져로 파주는 그런 물건이 아닌! 상당한 야망가였던 손견같은 이에게는 대단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당시로는 황실의 권위와 정통을 의미하는 물건이였다. 괜히 삼국지게임에서 옥새를 얻으면 여포도 매력이 100이 되는게 아니고, 원술이 아무리 또라이인들 이 옥새 얻고부터 황제의 꿈을 현실화시킨게 아니다. 게다가 당시 옥새를 분실한 후한 황실도 분실한 옥새를 새로 제작하지 못 하고 전전긍긍하던 것도 옥새는 어디 뒀는지 기억 안나면 다 서랍 뒤지고 엄마한테 어디 있냐 소리질러 찾다 끝내 기억 안나면 새로 마련하는 그런 물건이 아니였기 때문이였다. 옥새 이야기가 길어졌다만, 결론은.. 그런 어마무시대단굉장한 슈퍼레어템을 겨우(?) 아내 때문에 포기한 손견의 가족애가 깊었다는 것. 게다가 그런 가족애는 당시의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들에게는 결여된 가치관이였다는 점이다. 당장 조조만 해도 자기 죽게 생겼으니 장남 조앙을 내버렸고(당시의 장남의 가치와 위치는 상당했음!) 인의의 아이콘 유비도 자기가 위급하니 부인들과 형제들 내팽개치고 지살자고 혼자 내뺐으며, 기타 숱한 인물들이 아내나 기타 가족들에 대한 안위는 뒷전인 경우가 다반사였다. 여러분들도 만약 강남 테헤란로 한복판의 15층 짜리 빌딩 하나를 얻었거나 국회의원 공천권을 받았는데 누군가가 여러분의 아내나 여친을 인질삼아 내놓으라면 내놓겠나? (잠깐.. 당연히 안내놓는다는 전제로 이리 물어본 나만 혼자 지금 쓰레기가 되는건가!?) 하여간 단점도 적지 않았다만 이런저런 영웅호걸의 면모들이 있었기에, 그 DNA가 전달된 손책, 손권같은 이들이 그 인물많고 사건많던 중국 삼국시대 속에서도 큰 획을 그은 히어로가 될 수 있었다는 말씀! 오늘의 주인공인 굵고 짧게 살다 간 손견의 이야기는 여기서 매듭 짓는다. 이번 칼럼은 원래도 늦었지만 유독 더 많이 딜레이가 된 점 깊은 사과 드립니다...T-T 변명을 해보자면, 제가 늦은 나이에 다시금 학구열을 불태우느라 지금 사이버대학에 등록해 퇴근 후에 공부를 하고 있는데, 중간과제 제출 기간 및 중간고사 기간을 앞두고 과제와 시험공부 탓에 틈내기 쉽지 않았고, 또 한 가지는 제가 좀 더 좋은 회사에 보다 나은 조건으로 이직을 하게 되면서 이것저것 좀 정신이 없었어요.. 아무튼 저도 노느라 늦어진 것은 아닌 점 양해 바랍니다. 이번주와 다음주중으로 중간과제 제출도, 중간고사도 다 마무리 지어지니 그 후부터는 제깍제깍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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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 자경 (魯肅 子敬) A.D.172 ~ 217

이 칼럼을 시작하며 대략 스무 명 가량의 인물들을 다뤘지만 거의 매번 붙는 수식어가 바로 "연의의 피해자"라는 타이틀. 피해자가 있으면 반대로 수혜자도 있어야 하는데, 어쩌다보니 의도치 않게 피해자들만 줄줄이 다루고 있다...;; 오늘의 주인공 역시 비록 그 피해가 앞선 다른 이들에 비해 경미하기는 하나, 그래도 피해자라면 피해자인 인물. 바로 "노숙"이다. 적벽대전 앞두고 항복론자들이 대다수였던 오에서 가장 앞장서서 항전을 외쳤고, 유비세력과 오의 연합에 있어 일등공신에, 주유 사후 오의 군권을 총괄했던 그의 숨겨진 그리고 연의의 각색 전의 본모습에 대해 알아보자! 양주 임회군 동성현.. 오늘날 중국의 안후이성 딩위안 출신이며, 없어 보이는 이름과는 달리 양주의 대호족 출신 금수저였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오냐자식이였으며 대대로 있는 집 아들내미라 마음의 여유가 넘쳐나다보니 재산을 들여 인근의 빈자들을 돕고 베풀며 뜻 통하는 명사들과 사교나 하며 근심없이 살던 양반이였다. 정사의 노숙전에 따르면 우리가 아는 이미지와 달리 체격이 제법 큰 편이였던 것으로 보이며, 난세에 걸맞는 스킬을 보유해야겠다는 생각에 어려서부터 궁술, 마술, 검술 등을 익히고 가난하지만 힘 좀 쓰던 장정들을 어깨로 고용하여 적잖은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주유와의 인연도 이때 맺었으며, 당시 이미 공직에 있던 주유가 군량을 좀 협찬 받으러 노숙을 찾아가자 아예 곳간을 들어내다시피 퍼줬고 이에 뻑간 주유와 비즈니스를 넘은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고...ㅎ 이래저래 재산과 명성을 다갖춘 노숙을 가장 먼저 리쿠르팅한 것은 역시 당시에 상당한 유력군주였던 "원술". 그렇게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노숙이지만 원술의 하는 꼬라지를 보니 얘는 아니다 싶었고 당시는 무슨 사직서내고 마음대로 퇴사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였어서 원술의 스타일상, 그냥 그만둔다하면 뒤끝작렬이 예상되었던터라... 노숙은 일가친척 다 이끌고 짐을 싸서 '도망'을 친다. 그럼 그렇지, 빡친 원술은 애들을 풀어서 도망치는 노숙을 잡아오게 하였는데, 추격대와 마주친 노숙은 이들을 설득하는 한 편, 방패를 세워놓고 활로 이 방패를 꿰뚫는 슈퍼파월을 보여주며, 호락호락 잡혀가진 않겠다는 경고를 했고, 설득도 설득이지만 그 궁술을 보고 쫄아붙은 추격대는 그대로 되돌아 가버렸다. (벌써 이 대목부터 노숙이 문약한 선비가 아님이 드러남) 이러고 도망가서 의탁한 사람은 바로 자신의 과다협찬을 받고 베프를 먹은 '주유'였다. 이 때, 주유는 자신이 모시던 "손책"과 노숙의 미팅을 주선, 손책도 노숙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헤드헌팅을 하려던 때 노숙의 사실상 부모님에 진배없던 할머니께서 돌아가셔, 노숙은 할머니의 장례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 와중에 노숙의 친구였던 "유엽"이 마침 인근에서 세력을 키우던 '정보'(여러분이 아는 그 정보 아님)가 인재를 구한다니까 같이 가보자는 청을 받고 가려는데 (그냥 별 생각없이 아무나 섬기고 보는 스타일인가....) 그 소식 듣고 찾아온 주유의 설득에 당시 손책이 막 죽고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어버버하고 있던 "손권"을 섬기게 된다. (아무나 섬기는거 맞는 듯...-_-;;) 이 면접(?)에서 손권에게 노숙은 "천하이분지계"라는 테마로 프레젠테이션을 했고, 여기에 감명받은 손권은 바로 노숙을 임용한 뒤 최측근에 두고 쓰게 된다. 당시 노숙의 프레젠테이션의 거국적 스케일은 아직 미성년자요, 아버지를 여읜지 그리 오래지 않아, 사실상 아버지 역할하던 형까지 잃고 난 후 자기 혼자 어떻게 세력을 굴려야할지 가늠을 못 잡던 손권에게는 실로 파격적이였으며, 심지어 훗날 천하의 남쪽을 평정 후 천자의 자리까지 나가시라는 노숙의 우쭈쭈가 가미되어 손권은 기분이 째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손권의 평생 겐세이맨이였던 "장소"는 노숙이 아직 손권을 곁에서 바로 보필하기엔 젊어서 경험도 적고 태도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노숙의 임용을 반대했는데 그럼 그렇지, 손권은 장소의 말을 그냥 씹고 노숙을 중용했다. 보통 한 세력의 우두머리를 섬기기 전에는 그 휘하의 실세들과도 접견하는 시간을 갖는데, 손권의 당시 오른팔인 주유와 왼팔인 장소를 조우하던 자리에서 주유와는 그닥 코드가 안맞던 장소였던지라 주유가 왠 젊은 놈 하나 데려와서 주군 측근에 바로 꽂을라치니 장소가 노숙에게 시비를 좀 걸었나본데, 노숙 역시 손권 다음 No.2인 주유가 하도 설득을 해서 온건데, 왠 꼰대가 태클을 거니 그닥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았던 모양...ㅋㅋ 이때부터 장소와 노숙은 서로를 태클거는 상호태클지간으로 둘의 관계를 시작하게 된다. 노숙이 오에서 펼친 가장 대표적인 정책은 "친유비정책". 당시만 해도 유비는 자체 세력은 별 볼일 없이 유표에게 의지하다 유표가 죽고, 유표의 뒤를 이은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선언하여 형주의 반조조파였던 유표의 장남 유기와 결탁한 상태였는데.... 노숙은 비록 유비세력이 당장은 부실하지만 그 강대한 원소도 조조에게 작살나고 중원의 큰 세력이던 형주의 유씨집안도 조조에게 꿇은 상황에서, 천자를 등에 엎고 승상이라는 위엄을 지녔던 조조를 도리여 역적으로 몰며 대항하는 유일한 세력이며, 당시 천자인 헌제가 직접 족보를 뒤적여 한실의 종친임을 인정 및 좌장군이라는 결코 낮지 않는 공식직함도 파준 "명분"에 주목했다. 그런 유비와 손을 잡으면 유비가 가진 포텐과 명분을 빌려 조조와도 맞서고, 조조와 맞서는 것은 후한조정과의 맞다이를 의미하여 사실상 역적이 되지만, 유비가 지닌 명분 덕에 오히려 역적을 도모하는 정의파로 이미지 세탁이 되기 때문. 사실 유비의 이 메리트는 상당해서, 비록 한실종친이라고는 해도 서민출신에 세력도 별 거 없던 유비가 공손찬, 원소, 유표, 조조 등의 당시 내로라하던 강자들의 환영을 받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저 중 공손찬은 그런 유비가 지닌 명분보다 유비와의 개인적 친분으로 유비를 서포트 해주긴 했지만 당시같은 난세에 인격이 꽝이던 공손찬이 단지 그저 동문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비를 도왔을리는 없었기에... 당시 오 내부에서 이런 유비의 전략적 가치를 그리 크게 평가하는 이는 사실상 전무했다. 어쨌건 유비의 군세 자체는 당장 오에 있어 큰 전술적 가치가 없을만큼 대단치 못 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건 유비의 군사력만을 놓고 보는 한정적인 '전술적' 시야에서 그런 것이고, 그 외나 그 이후의 여러모로 넓고 멀리 바라보는 "전략적" 시야에서는 유비가 지닌 가치와 그 활용도가 대단했는데, 오에서는 이런 유비의 전략적인 요소를 뚫어보는 정치적 대국안을 지닌 이가 없었다는 뜻. 노숙은 손권에게 자신과 손권이 봐야 하고 가야 하는 길은 당장의 강동수성이 아닌, 장강 이남의 세력을 규합하여 강북을 평정한 조조와 대치하며 나아가 제위에 오르는 길임을 인지시켰고 그 시작점에서 시작하는 사업이 바로 친유비정책이였던 것. 노숙은 진정으로 손권을 위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자였고 유비에 대한 부분도 오로지 자기 주인에게 도움이 되는가 여부의 판단에 따른 것이지, 전혀 절대 유비가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닌 것이였고.. 이는 내 예전회사의 김이사에게 사람들이 들러붙어 온갖 설탕발림을 쳐바르는 이유가 회식 때마다 누구도 말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알고 와서 술빨, 안주빨 다 극대화 시키고 노래방 가자고 진상 부려서 다음날 출근할 사람들 새벽 4시까지 집 못가게 해놓고는 이사씩이나 쳐되는게 법카로 1원 아니, 1전 한 번 긁는거 없이 시발새끼 담배도 심지어 애들꺼 달래서 피우는 그 새끼를 사랑해서가 아닌, 그 새끼가 인사고과 평점을 메기는 나쁜놈의 새끼라 어쩔 수 없음과 같다. 노숙이 이러한 친유비정책을 진행하며 가장 주안점으로 삼은 것은 손권세력과 유비세력을 서로 상호의존관계로 만들어 이와 잇몸이 되게끔 유비의 세력을 어느 정도 성장시키는 것이였는데, 이러한 투자를 위해 노숙은 철저하고 꼼꼼히 유비를 패트롤 하기 시작 했으며, 유표의 사망 당시 조문을 구실로 유비를 첫 대면한 것을 시작으로 심지어 유비가 조조에게 작살나서 허겁지겁 쫓기는 상황의 장판파까지 가서 유비를 살피며 손권과의 동맹을 제시했다. 삼국지연의에는 이런 노숙의 모든 선견지명과 노력이 다 짤리고 그냥 제갈량이 손권 단물 빼먹으려 뭣도 없는 주제에 허세로 혼자 유-손 동맹을 결성시키는 듯 나오지만 사실은 이렇듯 노숙의 선노력에, 이를 합당하다 여긴 양측의 초천재인 제갈량과 주유의 납득. 그리고 이 재사 셋이 논리를 모아 손권을 설득한 결과. 결국 이 동맹의 시너지는 둘을 합친 것보다도 최소 5배 가까이 더 많고 경험많은 대군단을 거느린 조조군세를 불싸르게 되며 사실상 조조는 이날 이후로 장강 이남을 포기하고 유종의 항복으로 얻은 형주의 장강 이남도 잃게 된다. 이후 적벽대승의 지분으로 유비는 형주의 장사, 영릉, 무릉, 계양 및 남군의 공안까지 다스리는데 손권의 허가를 얻어내는데 여기서도 손권을 강하게 설득한 것이 노숙. 삼국지연의 속 노숙은 제갈량에게 놀아나고, 주유에겐 갈굼 당하며, 손권의 눈치를 보는 뭔가 강동의 빵셔틀처럼 나오지만 사실은 열라 기 쎈 주유, 손권에게 당장은 좀 손해여도 훗날을 위한 투자임을 인지시켜 유비에 대한 지원을 설득하고 또 이런 유비에 대한 서포트를 발판으로 손권을 황제로 만들려는 거국적 스케일의 정치가였던 것. 주유 사후, 주유의 간언 및 손권의 의지로 노숙은 오의 군권전체를 통솔하며 실질적인 오의 서열 2위가 되고 이 때 각 군영들을 시찰하며, 평소 글도 모르는 잡나부랭이 취급하며 무시하던 "여몽"이 니미 도리여 자기도 못 보는 부분까지 캐치해가며 자기를 가르치려들자, 그 유명한 오하아몽 & 괄목상대 사자성어가 등장하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후에 여몽편에서 다루기로.... 하여간 이때껏, 스스로 문무겸전이여서 장소처럼 매가리도 없는게 쥐뿔 글 좀 읽었다고 앵기는 것들, 이전 여몽처럼 무슨 대가리도 근육일 것 같은 힘만 쎈 무식종자들을 모두 무시하던 노숙이였으나 이 일을 계기로 여몽과 급친해진다. 이 와중에..... 노숙의 작품이던 유-손동맹의 금이 가는 사건이 발생하니 이는 바로 "유비의 익주정벌"... 일전에 주유와 감녕의 주도로 유장은 좆밥이고 형주도 비록 유비에게 임대주긴 했어도 실상 우리땅이니 이제 천하이분지계의 마지막 퍼즐은 익주를 먹자는 움직임이 있었고 당시 손권은 익주와 맞닿은 형주의 유비에게 이를 이야기하자 당시 유비는 유장이 자신과 종친이고... 그 땅은 오에서 멀며.. 험한 산악지대에... 들어가는 길목도 좁아 대군과 물자의 수송이 어렵고... 예로부터 장거리원정이 성공한 예가 드물고... 니들 거기 갔을 때 조조의 빈집털이는 어쩔 것이며.... 등등등등등등의 이유로 손권의 익주행을 반대했는데 당근 이는 제갈량과 유비 역시 자신들의 천하삼분지계의 마지막 퍼즐을 익주로 정해서였다. 아무튼 그때는 유비의 반대도 있고 하필 주동자인 주유도 죽어서 흐지부지 되었건만 그때 그렇게 거품물고 반대하던 그 유비가 익주를 따먹었다니까 손권은 빡칠 수 밖에 없었던 것... 이렇듯 유비는 익주를 먹으면서 자기의 본진인 형주는 관우를 남겨 수비케 한다. 이 때부터 관우는 명줄을 재촉하는 한편, 본인 스스로의 정치역량이 얼마나 후달리며... 또 본인 스스로 한 방면의 주둔 수비사령관으로서 얼마나 부족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 당시의 관우가 어땠는지는 훗날 관우편에서 자세히 언급하기로...ㅎ 아무튼 당시 형주와 오의 접경지역에서는 빈번한 충돌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때마다 노숙은 자기선에서 우호적으로 재량껏 처신했지만 그 도를 넘어서기 시작하자 참다 못해 관우에게 독대를 요청하고 관우도 이에 응해, 둘의 접견이 성사된다. 연의에서는 관우의 호기와 노숙의 호구의 대비로 표현하나, 실상은 절대 달랐...아니, 틀리다. 이 당시 관우와 노숙은 서로의 경호병력은 물리치고 단둘이 오로지 칼 한 자루씩만 차고서 만나 논쟁을 펼치는데, 물론 당시 장비와 함께 "만인지적" 칭호의 유이한 그레이트 관우는 맨몸이라한들 노숙이 칼 아닌 총을 차고 나갔어도 그런 노숙의 허리를 뒤로 접을만큼의 위력을 지닌 사나이긴 했으나 노숙 또한 풍체가 작지 않고 힘과 패기가 없는 이가 아니였기에 전혀 쪼는 기색없이 관우를 만나 언성을 높이며 따박따박 할 말을 한다. 숙 : 니네형 익주 먹었으니 형주 돌려줘. 우 : 뭔소리냐... 숙 : 땅없어서 가여워 빌려준거잖아. 돌려줘. 우 : 우리형이 가엽다니!!! 숙 : 조조한테 작살나 쫓겨온거 우리가 땅 빌려준거임. 그런데 익주도 생겼으니 꽁으로 빌리던 형주 줘. 우 : 우리 없었으면 니들도 못 먹을 땅이였어. 숙 : 하아.. 주유가 거의 다 차린거, 밥숟갈만 얹었잖아. 그럼 저번에 익주는 형제의 땅이라 우리보고 치면 안된다더니 남인 우린 못 하게 하고 형제라는 너희 형은 왜 그랬음? 그리고 형주 다 내놓을 거 없이 계약상 우리에게 빌린 지역만 달라는데 뭐 문제 있음?? 우 : 천하는 덕 있는 자의 땅이거든!!?! 숙 : 오호라? 그럼 지금 제일 넓은 땅 가진 조조는 니미, 니네형과 우리 마스터보다 덕이 더 많아 땅부자 되신거임? 그럼 그 전 너희형은 덕이 부족해서 땅이 없었다 갑자기 덕폭탄 맞음? 아니 그리고 관우 니는 세상에 땅크기로 사람덕을 측정하는 덕투력측정기였음!??! 와.. 세상이 관우를 의사랬는데 이거 뭐 그냥 복덕방 아저씨였네.. 대실망 우 :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숙 : 그게 아니면?? 우 : 날씨가 좋군! 숙 : 뭐래는거야 이 수염쟁이가... 땅내놔! 우 : 씨팔 형한테 말해! 왜 나한테 지랄이야 지랄이! 결국.... 오는 익주의 유비에게 사자를 보내 강력 컴플레인을 걸고 유비측은 자신들이 실효지배 하고 있으나 영유권을 주장하는 오에 장사, 강하, 계양 세 군을 되돌려 주게 된다. 사실, 유비측 입장에서도 노숙의 저 논리에 마냥 데꿀멍되버릴만큼 명분 없는게 전혀 절대 아니였으나 늘 춘추를 지니고 다니신다는 관운장께서는 그저 폼으로 춘추좌씨전을 갖고 다니신건지, 매번 첫 페이지만 읽다 잠드셨는지는 모르나... 노숙의 어거지에 제대로된 대꾸 몇 마디 못 해보고 리타이어 되버리는게 바로 정사! 아무튼 다 떠나서 이번은 노숙편이니만큼 노숙이 주인공이니, 노숙입장에서 보자면 그 무력깡패인 관우와 독대하고도 일절 위축없이 자기주장을 내세워 관우를 그로기상태로 몰아간 그의 패기와 용기는 실로 대단한 것이다. 부잣집 금수저에 어려서부터 베풂을 좋아했다고는 하나, 본인 스스로에 대해서는 검소했고 스스로에게 있어서 상당히 엄격했던 사람이였다. 다만, 남에게도 엄격했던거 같다... 기록을 보면 거의 활자중독에 가까운 사람이였는지, 시국이 안좋고 격무에 시달릴 때조차 책을 읽었다. 주량이 약한건 아니였던듯 보이나 필요해서가 아니면 좀처럼 입에 대지는 않았던거 같다. 본인이 인정할만하다 싶으면 스스로를 낮추며 공경하는 자세로 대했으나 그렇지 않다면 단호박이였다. 그리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미지나 당장 그러한 이미지들의 결실인 첨부던 일러스트들만 보더라도 그냥 문관필이지만, 일반 행정관련 내정을 본 적이 없는 군무만 봐왔던 인물로, 전장에도 수 차례 출전하며 야전경험도 적잖았던 사람이였다. 주유 사후에 대도독을 맡으며 오의 No.2였으나... 안타깝게도 장수하진 못 했다. 사망원인으로는 과로에 의한 급성사와 위암설이 있으나 둘 다 유력하진 않다. 언변이 워낙 좋았다고 하는데, 말을 길고 화려하게 하진 않았지만 할 말만 조리있게 딱딱 짚어 하는 스타일이였다. 오와 손권의 미래전략에 있어 오의 마지막 진보주의자였다. 주유와 노숙만이 진정한 오의 팽창주의자였기에 오의 물리적 확장을 추구하며 그와 관련된 전략들을 제시하며 준비했었으나 그 후의 여몽과 육손 등은 물론 훌륭한 인재들이긴 했어도 오세력의 유지와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을뿐 사실상 오의 대외진출에는 소극적이였다. 물론, 훗날 제갈각이 있긴 하나 주유 & 노숙과는 조금 다른 사례이기도 하고... 사실상 노숙의 사망과 함께 오는 천하이분지계나 노숙이 주장하던 개념의 천하패권은 물건너 간 셈이다. 물론, 천하이분은 아니여도 삼분은 했다지만 이는 위와 촉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와중에 오의 의지와는 별개로 형성된 것에, 손권이 제위에 오른 부분 역시 천하의 패권을 쥐고 기성국가의 권한을 이양받으며 제위에 오른 조비나 그 기성국가의 명맥을 이어 부흥을 꾀하고 기성국가를 패망시킨 국가를 타도한다는 명분으로 제위에 오른 유비의 그것에 비해... 딱히 세가 커진 것도, 명분도 없는 그냥 날치가 뛰니 짱뚱어도 뛰는 식의 미투제위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가 제시한 친유비정책은 단기적으로야 오에 손실 또는 이익의 저하를 가져오긴 했으나 바로 그 전략덕에 오는 물론 유비세력 역시 초반의 그 엄청난 기세로 남하하는 조조에 맞서 이길 수 있었던 것. 노숙 사후와 맞물려, 유손동맹이 와해되고 관우의 사망이 겹치며 이는 또 이릉대전으로 옮아가는 와중에.... 훗날 제갈량의 고군분투로 촉오동맹이 재건되기까지 안그래도 둘이 합쳐 위에 못 미치는 촉과 오는 서로간의 싸움으로 적잖은 국력을 소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노숙은 어느 조직에나 있진 않지만, 어느 조직에나 필요한 "미래와 성장"을 내다보는 진취적인 인물이였다. 열 명, 백 명의 현상유지자들보다 이런 한 두 명의 진보주의자들이 있을 때 그 조직은 나중을 준비하고 또 그 나중을 준비하고자 새로운 것을 시도하게 되며 투자라는 것을 할 수 있다. 물론, 미래에 대한 투자의 불확실성은 어쩔 수 없는 리스크지만 이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할 뛰어난 컨설턴트가 필요한데, 오와 손가에게 있어 바로 그 마지막 컨설턴트였던 노숙이였다.

용아 맥 취소표 알리미 - yong-a maeg chwisopyo alli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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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 대한 이해도 높이기 2.

지난번에 이어, 오늘도 삼국지를 보다 쉽고 재미지게 접하는데 도움을 줄만한 팁들을 준비해 봤다. 삼국지를 아직 읽지 않았다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고 이미 읽어본 분들 역시 한결 넓게 바라볼 수 있게끔 삼국지에 대한 이해도 높이기 2 Start!! 1. 무기. 삼국지연의 속 장수들은 저마다의 무기들을 쓰고 이 무기들은 곧 그 유져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분신의 역할을 하기도 하며, 정말 다양한 무기들이 등장한다. 관우의 청룡언월도, 장비의 장팔사모, 손견의 고정도, 전위의 쌍철극, 여포의 방천화극, 정보의 철등사모, 기령의 삼첨도, 서황의 개산대부, 황개의 철편, 유비의 자웅일대검 등등.. 열거하기 귀찮을만큼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숱한 무기들 중의 대다수는 당시에 실존하지 않았던 것들. 대표적인게 관우의 트레이드 마크인 "청룡언월도". 먼저, '도(刀)'는 한쪽만 날이 있는 칼, '검(劍)'은 양쪽 모두 날이 있는 칼을 뜻한다. '청룡도'는 너비가 넓은 도를 일컫는 말이며, '언월도'는 '월도'라고도 했는데 이는 긴 자루가 달린 도를 일컫는다. 고로, '청룡도 + 언월도 = 청룡언월도'라 함은 긴 자루 달린 청룡도를 말한다. 너비가 넓다보니 일정 수준 이상 부피가 있던 무기인 청룡언월도는 대체로 일반 도검들에 비해 중량이 좀 나가는 무기였고, 찌르기보다 베기용이긴 했다만.. 날카로움으로 벤다기 보다는 무게로 내리찍는 용도의 무기였다. 왜냐하면 당시의 제철수준으로 큰 월도를 날카롭게 제련하는 기술력의 한계가 있었고, 설령 내가 쓰는 질레트 마하3 면도기날처럼 어찌어찌 날카롭게 만들었다 한들... 몇 번만 쓰면 금새 날이 무뎌지기 마련. 게다가 날카로우려면 단면이 얇아야 하고 또 얇게 만들다보면 그만큼 가벼워지니 살상력이 떨어진다. 쉽게 말해, 청룡언월도에 맞으면 영화나 만화처럼 '뎅겅~'하고 썰리는게 아니라, 짓뭉개지며 박살이 나는건데, 심지어 연의에서의 묘사에 의하면 관우가 썼다는 청룡언월도의 무게는 무려 "82근"! 혹자는 한대의 한 근은 지금의 한 근보다 가벼워, 당시의 여든 두 근은 대략 18kg쯤이라고 하는데, 나관중이 명나라 사람이라 명대의 도량형으로 설명 했기에 청룡언월도의 무게는 48kg이 맞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무기 + 그 무기 휘두를 덩치 + 갑옷 + 안장 + 마갑 = 어림잡아도 230kg을 넘어가는데 그럼 말은 도대체 무슨 죄인가? 더구나 아무리 장사여도 저 중량의 무기를 휘두르기 위해 마상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데, 그 시대에는 말 타며 균형 잡고자 발을 거는 등자가 몹시 어설퍼, 제 기능 발현이 어렵던 시기였다. 일단 송나라 때에나 등장한 청룡언월도를 관우가 썼을 리 없고 정사기록에 "관우가 안량을 찌른 후 목을 베었다"라는 구절을 볼 때, 관우는 '삭'으로 불리는, 당시 기병의 보편적 주무장인 찌르기용 창을 썼다고 본다. 그리고 '여든 두 근'이란 표현도 실제 측량무게가 아닌 관우의 파워의 대단함을 묘사키 위한 나관중의 중국인 종특인 과장의 산물이다. 소설과 인물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부여된 일종의 아이템같은 개념이였던 것이다. 장비의 "장팔사모" 역시, 지금 추산 시 5m가량의 기나긴 창으로 묘사되지만 한대에는 그런 긴 창은 쓰지도 않았거니와 동서양 역사에서의 그런 길고 긴 창은 보병의 대기병전용 무장이였지, 말 위에서 휘두르기는 너무 불편한 무기였다. 당시의 백병전은 인정사정 없었고 사소한 실수, 작은 삑사리 하나로 장애인이 되거나 바로 요단강에 발을 담그는 리스크가 될 수 있기에... 여든 두 근 청룡도니, 한 장 여덟 척 장팔사모니 하는 후까시용 무기보다는 그저 실용적이고 쓰기 편한 무기가 답이였다. 여포의 방천화극 또한 그 "방천화극" 자체가 역시 청룡언월도와 마찬가지로 송나라 중엽에서야 등장하는 무기였기에 픽션이며 그냥 찌르기용 '극'을 쓴 것으로 보여진다. 삼국지 등장 장수의 거의 8할이 "찌르기용 창"을 실제로 썼는데, 이는 '베기'보다 '찌르기'가 더욱 적은 에너지와 운동각으로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기에 체력소모와 한 번 움직임에서 다음 움직임 까지의 인터벌을 최소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베는 창을 쓸 경우, 창을 더욱 높이, 크게 휘둘러야 상대에게 치명상 입힐 수 있는 반면... 빗나갈 경우 오히려 상대에게 역관광을 당하기 제격이다. 그렇다고 적은 각도로 움직이면 운동에너지나 원심력이 제대로 실리지 않아, 상대에게 그만큼 데미지를 많이 주지 못 한다. 놀랍게도 "쌍철극"의 경우, 정사에 전위가 80근의 쌍철극을 휘둘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그 당시의 사료이므로 한대의 도량형에 따라 지금 기준 약 16~18kg가량의 무기가 맞다. 2. 일기토. 일본어의 "잇키우치(いっきうち, 一騎討ち)"에서 한자어인 '一騎討'만을 우리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기마무사간의 1vs1 대결을 의미한다. 사실 한, 중에서는 거의 안쓰는 한자어인데, 국내에서는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 탓에 1대1 결투의 일반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정말 숱하게 등장하는게 바로 저 일기토이지만... 놀랍게도 실제 역사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일기토 기록은 열 손 이내 밖에 없다. 192년 "여포 VS 곽사" (장안) 놀랍게도 곽사가 먼저 결투 신청. 그럼 그렇지, 여포의 창에 맞고 죽기 직전에 부하들이 곽사 구출. 196년 "손책 VS 태사자" (곡아) 말 타고 싸우던 중 손책이 태사자의 말을 찌르고 (나쁜새끼), 태사자의 창을 빼앗자, 태사자는 낙마하며 손책쪽으로 넘어지며 손책의 투구를 슈킹. 196년 "학맹 VS 조성" (하비) 여포에게 반기를 든 학맹과 조성이 싸우던 중 고순이 나타나 학맹을 죽임.(읭?) 196년 "마초 VS 염행" (서량) 그 천하의 마초가 염행의 창에 찔려 죽을 위기 맞음. 단, 당시의 마초는 만 19세로 아직은 경험미숙.. 200년 "관우 VS 안량" (백마) 추후 관우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음. 202년 "방덕 VS 곽원" (평양) 방덕이 당시 난전 중에 적병을 그냥 막 죽이던 와중에 곽원도 섞여 죽음.(이건 좀...;;) 208년 "여몽 VS 진취" (강하) 유표군과 싸울 당시 선봉이던 여몽이 적 수비대장 진취와 맞서 싸움. 2011년 "김형수 팀장 VS 이민형 과장" (백림호프) 만취한 이과장이 김팀장에게 반말로 도발하자 이에 격한 김팀장이 숟가락 볼록면으로 이과장의 정수리를 갈겨 단 일 합에 이과장을 처단. 사실, 일기토 자체가 성사 쉽지 않을 수 밖에 없는게, 저건 보는 사람이나 재미있지... 당사자들로서는 자신 뒤의 수 많은 군세의 기세를 책임진 상태에서 사소한 실수 하나로 자기 목숨은 물론, 전술적 승패를 갈음 짓는 1대 1 대결은 실로 무모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기고 있거나 우세한 군세의 우두머리가 이겨도 본전에 지면 그야말로 대참극의 아비규환을 불러올지 모를 그딴 제안에 응할 리가 없다. 그럼 상대가 응하지 않는데 홀로 싸울 수도 없다. 그리고 어지간한 급의 장수들은 영화나 만화처럼 행군 중이나 군사들간 대치 상황에서 가장 맨 앞에 나와 보란듯이 있지 않았다. 그럴 경우, 상대방의 활에 의한 저격에 피격될 위험성이 높기 때문. 물론, 장수의 화려한 차림새나 그 주위의 대장기를 든 호위대 등으로 분명 눈에는 띄었을 것이나, 가장 선두에 다 보란듯이 나와 있진 않았다고 한다. 솔직히 이게 뭐라고 쓰는데 두 시간 걸린다는.... 쓰고 나면 지치지만 여러분들이 주시는 관심 가득한 피드백들이 그런 피로를 잊게 해줍니다ㅎ 연재가 더디긴 해도 심도깊은 내용으로 차차 다룰 소재들이 매우 많으니 인내를 갖고 기다려 주시길 양해 바라며 타인을 비방하거나 불쾌히 만들 댓글은 자제 부탁 드려요. 궁금하신 점 등은 댓글로 문의 주시면 아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답변 드리고 있습니다! 주관적 견해를 바탕으로 한 논쟁은 도돌이표인 경우가 많고 감정만 상하기 부지기수라 응하지 않습니다. 역사와 삼국지라는 다소 고루하며 남성적인 소제를 다룸에도 예상외로 적잖은 분들의 관심과 기대에 늘 고마움 갖고 정성껏 쓰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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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저 중강 (許褚 仲康) A.D.? ~ ?

사람 보는 안목도 훌륭했고 용인술도 뛰어났으며 철저한 능력 위주의 인재기용 방식을 추구한 실리주의자 "조조"의 휘하에는 모두가 알다시피 삼국시대 당시 가장 많고 두터운 인재풀을 자랑한 삼국시대의 레알 마드리드 라고 할 수 있었고 응당 그런 조조 아래에는 뛰어난 무장들도 참 많았다. 여러모로 뛰어나거나 조조와 코드가 맞아 신임을 얻은 장수들도 여럿 있었지만, 사료를 살피고 그 모든 것들을 토대로 볼 때 조조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가장 많이 받았다 느껴지는 장수가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허저"였다. 오늘의 주인공은 이 진짜 "스트롱맨"인 이 인물로 간다. 오늘 날, 중국 안후이성 보저우시 출신인 허저는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며 당시 온갖 히어로들.. 그중에도 특히 범인을 훌쩍 초월하는 피지컬과 신체능력을 자랑하는 차이니즈 슈퍼히어로들 중에서도 가히 압도적인 진짜 '스트롱맨'이였음이 기록에 나온다.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하는 허저 관련 에피소드들 중 허저가 조조 휘하로 임관 전... 고향에 살 당시 1만 여명 이상의 대규모 도적떼가 허저의 고향에 침공했고 대치에 지친 양측이 휴전을 합의하며 도적들의 곡식과 허저측의 소를 물물교환 하는 와중, 소가 놀라 달아나자 그 소의 꼬리를 한 손(!?!)으로 잡고 백여 걸음을 끌고 갔다는 이 말같잖고 믿기지 않는 스토리가 엄연하게도 위서의 허저전에 실려있다.... 당시 후한말에 일반적으로 사육하던 소의 품종, 암수(♂♀)여부, 소의 연령, 소의 영양상태 등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품종여부 떠나 소라는 동물 자체가 원체 크고 암수의 무게차도 상당하지만 암컷인들 일반인에게 끌어 당겨질 무게는 아니며 어린 송아지 또한 지금 이 글 쓰는 나, 읽는 댁들이 힘으로 해볼 수준을 가뿐히 넘어서고 당시 허저측이 처한 환경이 열악해 사람도 제대로 못 먹어 오죽하면 도적떼에게 고기를 주고 곡식을 받아오려는 시도까지 한 점등 비추면 소인들 제대로 먹어 평소의 몸상태는 아니였겠으나 그렇다한들 소는 소인지라 어쨌건 사람이 일신의 용력만으로 한 손끌이를 할 생물이 절대 결코 아님은 명백하다. 게다가 소의 꼬리를 잡아끌었다는건 소 또한 순순히 끌려가지 않고 그러지 않으려 끌려가는 반대방향으로 가려고 용을 썼다는 이야기인데... 전 중국 및 전인류사에서 최강의 파워맨이라 일컬어지는 항우가 이런 허저보다 힘 좋았을까 싶을만큼 여간 대단한 힘이 아니다. 위서에 의하면 신장도 "여덟 자 남짓" 이라 하는데, 당시 후한 말 기준의 여덟 자가 현대 기준의 거의 190cm에 가깝고 '남짓'이라는 표현은 여덟 자를 좀 넘는다는 뜻. 게다가 후한 말 관련 모든 역사서들 중 유일하게 허저는 허리둘레에 대한 언급이 있다. 당시 단위로 "10위"나 되는 허리둘레를 지녔다고 나오며 이 역시 현대기준 무려 115cm(45inch가 넘는다!!)라는... 당장 이 수치는 체격이 작은 편은 아닌 내 가슴둘레를 넘어선다.. 아마도 위에 언급된 인간계 끝자락급의 파워를 볼 때 엄청난 근육질이였을 것으로 보이며 저런 피지컬까지 지닌 것으로 보아, 대략 상상해보면 '브록 레스너'나 '밥 샙' 정도 되는 체구를 가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런 거구들은 지금도 길에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들 쳐다볼만큼 눈에 띄는 엄청난 거한들인데, 성인남성의 평균신장이 146cm 가량 정도였을 후한 말의 중국에서는 그야말로 단순 거인을 넘어서, 방금 화장실 다녀왔더라도 마주하면 소변을 지릴 괴물이였음이 분명하다. 이런 엄청난 신체조건 + 신체능력을 지닌 초인 허저는 조조가 허저의 고향 일대를 점령하자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을 이끌고 조조휘하로 가는데, 당시의 조조 또한 허저의 체구를 보고 심히 놀랐다는 기록이 있고 이 당시 "실로 나의 번쾌가 될만하다!!" 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조조는 허저와 그가 이끌고 온 장정들을 고스란히 자신의 근위대 즉, 최측 호위대로 임명했다고 하는데 당시같은 난세에 당시 조조가 듣보잡이 아니였음에도 그런 새로 갓 합류한 이들에게 자신의 신변경호를 맡긴 것을 보면 허저를 굉장히 좋게 보고 신뢰했던 모양인데, 이때부터 조조는 허저에게 반한 듯 싶고 조조의 알음알음 허저 챙기기가 시작되었던거 같다.ㅎㅎ 허저는 생김이나 체구, 그 압도적인 신체능력 등을 갖추고도 전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샤이가이였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눈에 띄는 것도 싫어해서 조조가 장수들을 집결하면 가장 구석이나 뒷편에 숨겨지지도 않는 체구를 한껏 움츠려 섰다고 한다. 조조는 장수들이 군공을 세우면 많은 이들 앞에서 당사자를 불러내 크게 칭찬하는 방법으로 당사자를 띄워주고 다른이들도 분발을 유도했는데, 부끄럼쟁이 허저는 간혹 공을 세우고도 이런 수 많은 사람들 앞에 불려나가 주목을 받고 추켜지는 것에 상당히 큰 부담을 갖고 있었고... 조조가 그를 앞으로 호명해도 못 들은체 딴청을 부리고 밍기적대다 거듭 그를 불러도 쌩까는 허저를 조조가 호통을 쳐 부른 후에야 마지못해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성격이 저런 사람이다보니 말도 거의 없었던 듯. 그러나 할 말은 하는 편이였던거 같고 하루는 형주방면 총사령관이던 조인이 급한 보고를 위해 허창으로 갔는데 당시 조조가 바쁜 정무 중이였고 조인은 맡은 중책이 중책인지라 조조를 기다릴 겨를은 없어 허저에게라도 메모를 전달하려 허저를 불렀다. 허저는 조조의 인척이자 최측근이고 방면군 사령관인 조인의 부름을 거절할 수는 없어 조인에게 갔는데.. 조인 : 아, 허중강! 나 지금 쫌 급한데 말 좀 전해줘! 허저 : 기다리시면 전하 곧 나오십니다.. 이러고는 조인의 대꾸도 듣지 않고 바로 휭~ 조조에게 돌아갔고 이날 이후 조인은 허저를 벼르기 시작한다. 조인은 다시 정욱을 불러 이 일을 이야기했고 정욱이 듣고 놀라 허저에게 가서 물었다. 정욱 : 중강! 사회생활 참 못하네.. 조장군 성격 몰라? 전하의 친척에 측근에 개국공신인데 왜 그러셨대? 허저 : 암만 그래봐야 저 사람은 방면 맡는 바깥사람이고 난 전하의 신변경호를 맡았는데 내가 왜 전하의 허락없이 외부인을 만납니까... 이 에피소드가 조조의 귀에 들어가자 안그래도 이쁨받던 허저는 더욱 조조의 사랑을 받았다. 허저와 조조는 아무래도 주군과 호위관이다보니 서로 붙어있는 시간이 길었는데, 허저는 종종 옷매무새가 허술하거나 한 경우 조조가 이를 먼저 보면 직접 옷매를 다시 챙겨주기도 했고, 조조가 식사시에 조조곁에 서서 조조의 식사를 지켜보는 허저에게 같이 식사를 권해서 허저가 응하면 함께 먹기도 했다. 허저는 자신이 좋아하는 찬이 있으면 응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며 응하지 않았다.... 허저가 체격이 체격인지라 허저가 타는 말은 금새 지쳐 여러 마리를 번갈며 탔는데, 허저가 탈 말은 조조가 직접 선별해 골라줬고 경우에 따라 자신이 타고 있는 말과 바꿔타기도 했는데, 주군이 신하와 말을 바꿔 타는 것은 당시 "말"이라는 동물의 군사적, 물질적 가치를 고려하면 대단한 호의를 베푸는 것이였다. 게다가 당시의 조조가 타는 말이 예삿말들도 아니였고.. 이는 마치 내가 새로 간 회사 사장님이 외근 나가며 업무용 레이를 타는 내게 자신의 아우디 Q7을 타고 가라며 바꿔 주는 것이나 진배 없는 것이다. 조조의 경호실장이면 거의 대부분 조조의 가장 근처에 있다보니 전장에 나가 지휘를 맡은 적이 드물지만 없진 않다. 양에서의 장수와 전투 당시 돌격대를 맡아 돌진하여 적의 기세를 꺾었던 적도 있고, 관도대전과 원소 사후, 원소의 잔당들을 정벌하는 중 업군 포위전 당시에도 소수나마 병력을 이끌고 나선 적 있다. 하지만 사람을 적재적소에 잘 쓰는 조조가 그를 호위관으로만 거의 중용하고 전장에 내보낸 횟수가 다섯 손에 꼽히는 걸 보면 통솔능력은 별 볼일 없었던 것 같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종종 허저의 일기토 내용들이 나오던데 올뻥이다. 허저는 누군가와 1vs1로 전투에서 맞붙은 적이 없다. 전위와 조조의 경호패키지로 묶음처리 되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둘은 연의에서처럼 서로 맞붙은 적도 없고 심지어 둘이 얼굴을 마주한 적조차 없다. 왜냐 하면 실제 역사에서는 전위가 이미 사망한 후에 허저가 조조휘하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삼국지연의의 내용 및 이를 토대로 캐릭터들의 능력치를 데이터화시킨 코에이의 삼국지 게임 내의 허저 어빌리티만 보면, 왠지 자기 이름이나 쓸 수 있을지.. 1부터 10까지 숫자는 셀 수나 있을런지 싶을 힘 쎈 바보로 그려지지만 절대 그런 사람은 아니였다. 조조에게 임관 전에도 고향에서 도적떼를 상대로, 또 조조에게 임관 하면서도 자신을 따르던 적잖은 무리들이 있었던 점 등으로 봐서 아주 근본도 없는 사람이 아니였고 정사나 위서, 그의 열전 등 어딜 봐도 '허저는 빠가였다'는 식의 언급은 진짜 1도 없다. 다만... 워낙 별 말이 없고, 게다가 이게 좀 치명적인데 허저는 평상시에 입을 약간 벌린 눈도 촛점없는 멍한 어딜 보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이 표정 탓에 그의 별명은 "호치(虎癡)"가 된 것.. 저 허저의 유명한 닉네임 호치의 호는 범 호, 다시 말해 전장이나 임무수행 및 조조곁을 지킬 때의 그의 호랑이같은 무시무시한 기세를 뜻하는 것이지만 문제는 뒤에 붙은 저 '어리석을 치(癡)' 인데... 저 치가 바로 허저의 그런 평상시 표정 탓에 붙은 것이였다. 그치만 허저입장에서 이것도 좀 억울한게, 조조곁에 있거나 전장이거나 뭐 그러면 모르지만 진짜 아무일없는 평상시에 조조가 내전에서 업무 보거나 천자를 알현, 또는 자거나 등등 그럴 때의 허저는 혼자 긴 시간을 문앞에 서 있어야 하는데 이 당시에 무슨 스마트폰이 있어서 허저가 유튜브나 빙글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쨌건 근무시간인데 이어폰끼고 음악 들을 것도 아니고, 진짜 할 수 있는거 없이 서 있는데 누군들 표정이 저리 멍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고 영국 왕실근위병들처럼 뭐 교대를 하는 것도 아니였을 것이고.... 당연히 허저는 본인의 저 별명을 싫어했고 위나라 내부에도 감히 허저앞에서 저 별명을 입에 담을 수 있을 힘과 용기를 지닌 자도 없었지만 어쨌건 허저가 기피하던 저 닉네임은 훗날... 동관에서 마초, 한수와 마주할 때 마초가 바로 달려가 조조를 개 때려잡듯 하려다 조조가 데려간 허저의 비쥬얼을 보고 짐짓 쫄은 마초가 "조공에게는 호후(虎侯)가 있다는데,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말해준 후부터 "호후(虎侯)"로 격상된다. 삼국지연의에서 업을 함락 후, 깐죽대는 허유를 빡친 허저가 죽이는 씬이 나오지만 허구다. 저런 일 자체가 없었고, 허저의 성격상 단지 저렇게 깝친다고 하여 아무나 썽큼썽큼 죽이는 스타일이 아니였다. 일에 있어서는 더할나위없이 용맹무쌍했지만 평상시도 거칠고 격한 그런 사람이 아니였다. 평소에는 온순하니 풀 뜯지만 맹수가 다가오면 날뛰는 아프리카 물소같은 타입이였던듯 싶다. 조조가 죽자 탈진하여 쓰러질만큼 울부짖었으며 어찌나 심신이 상할만큼 슬퍼했는지 각혈까지 했다고 한다... 조비 또한 허저를 근위로 삼았는데, 조조가 허저를 자신의 최측에서 경호하는 소수의 경호대를 이끄는 경호실장역을 시켰다면, 조비는 황실전체를 경호하는 황실근위대를 이끄는 근위대장같은 직책을 맡겼다. 허저는 생몰연대가 명확히 사료에 나와있진 않지만 조조의 죽음에 이어 그 아들 조비의 죽음도 봤다. 물론, 조비가 그리 오래 못산 탓도 있으나 아무튼 주군부자의 죽음을 모두 겪고 조조의 손자인 조예대에 사망한다. 여러 정황들 볼 때, 조예재위기에는 사실상 은퇴상태로서 원로예우를 받았던거 같고, 조예 재위 후 그리 오래지 않아서 사망한 듯. 사인에 대한 별 다른 언급도 없고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사망당시의 허저나이가 상당한 고령이였음으로 추정되기에 그냥 노환에 의한 병사였을 듯 싶다. 사실... 주군의 최측근 경호는 그리 공을 세우기가 쉽지 않은 자리다. 그럼에도 허저를 아끼던 조조는 그런 허저가 혹여라도 기가 죽을까, 늘 그가 있음에 자신이 마음 편할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큰 공이라며 그를 치켰고. 가끔은 허저를 전장에도 내보냈다. 허저가 근위대장임에도 몇 차례 전투에 나섰고 비록 몇 차례 안된다고는 해도 어쨌건 모두 승리했는데 추측해 보건데 이는 조조가 허저를 장수로서의 공을 세울 수 있도록 별 다른 지휘통솔능력이 없어 대병을 이끌기는 무리인 그가 소수병력을 이끌고나마 충분히 승리할 법한 전투에 가려 보내 허저로 하여금 주워 먹게끔 했던 배려로 보여진다. 허저 또한 박식똘똘이까진 아니여도 자신을 아끼는 그런 조조의 마음씀씀이를 캐치할 정도는 충분히 되었고 조조를 깊게 공경해 따랐으며 심지어 조조가 그에게 휴식을 명해도 허저는 이를 따르지 않고 거의 자는 시간을 제하면 조조의 지근거리에서 머물렀다. 삼국지 등장인물들 중 통틀어도 손 꼽힐만한 막강한 피지컬과 그에 따른 용맹과 괴력을 겸한 그가 전장을 휘젓고 싶지 않았을리가 없다. 하루종일 자신의 엄청난 신체를 서 있는데 써야함이 실로 괴로웠거나 자괴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책임감과 충성으로 묵묵히 해냈다. 비록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부여받더라도 이를 최선 다해 충실히 해내는 프로패셔널. 그렇기에 조조는 늘 자신 곁에 시립해 서 있는 그를 대함에 있어, 외지의 수만 병력을 이끌고 요충지를 지키는 사령관, 전장에서 대규모 전투를 승리한 개선장군들에 못지 않게 대했던 것이다. 어찌보면 허저 본인도 그런 자신의 성품 덕에 그 험한 난세에서 난전이나 내부적 정치싸움에 휘말림없이 내내 인정받다 천수를 누렸는지도 모르겠다. 다들 즐거운 주말 잘 보내시고 사전투표 안하신 분들은 돌아오는 화요일에 꼭! 잊지 마시고 투표 하시길 바랍니다ㅎ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대의명분에 입각해 각자가 생각하는 최선의 후보분께 소중한 한 표를 반드시 행사하세요! 사려깊은 문후보님, 구여우신 홍후보님, 총명하신 안후보님, 기개있는 유후보님, 혁신적인 심후보님 모두 화이팅 하시길. 그리고 누가 대권 잡건 부디 국가와 국민을 진정으로 위하는 참지도자 되길 기원합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ㅎ 무슨업적도 필요없이, 앞 둘이 워낙 10년 깽판이라 평타만 쳐도 성군소리 들을 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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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찬 백규 (公孫瓚 伯圭) A.D.? ~ 199

삼국지를 워낙에 좋아해서 여기다 시간 들여가며 이런 글까지 쓸 정도다보니 나름 삼국지에 대해 좀 아는 편이라 할 수 있는 내가 여러 자료들을 지금까지 보고 듣고 하다보면 그 인물에 대한 호감도를 떠나 참 안타까운 이들이 많다. '이 사람은 왜 이럴 수 밖에 없었을까' '왜 이 인물은 이런 선택을 해야만 한걸까' '그는 결국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건가' 그 중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오늘 다룰 인물 "공손찬"이다. 아마 게임이건 만화건 애니매이션이건 책이건... 소설인 연의를 읽었건, 정사를 읽었건.. 공손찬을 좋아하거나 궁금해 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특히 삼국지연의를 읽은 분들은 더더욱 공손찬을 좋아하거나 궁금해하지 않는데, 일단 연의에서의 그는 워낙 초반부에 등장하고 별 다른 임팩트도 없는, 드래곤볼을 예로 들자면 손오공이 어린 시절에 등장해서 잠깐 오공을 애먹이지만 얼마 못 가서 즈려밟히는 '타오파이파이' 정도의 취급... (혹시 누군지 모르면 포털사이트 검색 Go) 그나마 코에이의 삼국지시리즈를 즐기는 분들이 보다 고난도의 천하통일에 도전할 때나 선택할 인물. 하지만 역사 속에서의 그는 결코 그런 대접을 받을 엑스트라급은 아니였음을 오늘 글을 통해 밝혀 보겠다. 삼국지연의에서도 나오듯 실제로도 당대의 이름 높던 학자인 '노식'의 문하에서 유비와 함께 공부한 동문이고 그 때의 인연으로 유비가 공손찬이 막장테크 타기 전까지 공손찬의 객장으로 있기도 했다. 이쪽도 생전의 라이벌이던 원소처럼 적자가 아니지만 얼자였던 원소보다는 사알짝 나은 '서자'였는데 뭐 우리가 보기에는 도찐개찐... 어쨌건 집안도 원소의 원가에는 댈 바 아니긴 해도 나름 괜찮은 집안의 은수저출신. 공손찬의 집안은 대대로 유주일대의 태수를 지내던 가문이였는데, 원소네가 일전 원소칼럼에서 소개했듯 중앙정부 고위관직자 집안이라면 공손가문은 군수집안쯤? 이걸 보고 혹자는 'ㅋㅋㅋ군수 나부랭ㅋㅋ' 할 수도 있지만 이건 여러분들이 군수를 몰라 하는 소리다. 군수는 3급 공무원이며 군으로 치면 준장(★)에 준하는 정말 높은 자리다. 아무튼 저런 집안 출신이지만 서자인 관계로 지분을 이어받지 못한 Mr.공손은 첫 사회생활을 유주의 말단관리로 시작하는데, 이 때 맡은 업무는 각종 공문서를 필사, 즉 베껴 쓰는 일이였다. 당시는 복사기도 없고 이메일, 팩스 뭐 그런거 다 없으니 공무에 있어 이리저리 나가고 들어오는 문서들을 누군가 직접 보고 필사를 했는데, 그 일을 했다. 인간복사기로서 공손찬은 꽤 유능하여 문서들을 취합 후 요점을 추려 알아보기 쉽게 잘 정리하여, 그가 정리한 문서는 누가 봐도 업무현안이 눈에 잘 들어왔는데, 게다가 공손찬은 말도 조리있게 잘 했고 인물도 좋은데다 "목소리도 좋았다"고 한다. 이런 점들이 소문나며 어느 태수가 그를 점 찍어 사위삼고, 그 후 그를 노식에게 유학시키는 등 이때부터 공손찬의 포텐이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헌데 어느 날 저 공손찬의 장인되는 태수가 비리죄목으로 파직당해 유배를 가게 되었다. 저 당시가 워낙 나라꼴 개판이라 털어 먼지 안나는 태수가 몇이나 있겠냐만... 저 때는 매관매직도 흔했는데 이를테면 A : 저 이거 받으시고 저 벼슬 좀 ㅎㅎ 고위관리 : 오~ 1억전?!! 뭐 하고 싶은데? A : 영릉태수요! >_< 고위관리 : 콜! 조또마떼! (영릉태수 공석 시 발탁, 헌데 기존 태수 재직인 경우...) 고위관리 : 영릉태수 이놈개새끼, 2억전 세금 바쳐. 영릉태수 : 아.... (2억전 입금 시 유임 및 A에게는 다른 자리 물색! 미입금시....) 영릉태수 : 제가 2억전이 어디 있어요... 고위관리 : 넌 디졌어 (뭐가 되건 털어 난 먼지로 파직 또는 처벌, 그 자리에 A) 저런 경우가 적잖았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당시 이런저런 지방의 한 자리를 했던 이들은 위로 올려 보낼 세금(명목의 뇌물)을 채우고자, 또 저런 썩은 정부 휘하에서 일하다보니 본인도 썩어 대체로 백성들을 심하게 수탈하는 일이 다반사. 아무튼, 공손찬의 장인인 태수 '유기'(유표아들 아님)가 당시 일남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본인 또한 자기를 알아보고 키워준 은혜를 갚고자 유배가는 장인을 따라가기로 하고 살아 돌아오진 못할거란 생각에 본인의 "셀프 장례식"을 올리고 유배길을 따라나서는데... 위의 저 유배지 일남, 바로 지금의 베트남이다... 지금 아무 세계지도나 펴고 당시의 유주라 불리던 중국의 베이징 동북부 아무곳이나 찍고 거기서 베트남까지의 거리를 찍어보면 ㅎㄷㄷ... 심지어 그 당시의 베트남은 '오지 Of The 오지'였으며 사실상의 사형선고였던 유배령이였거늘, 공손찬은 은혜와 의리로 그곳을 죽는 각오로 따랐던 것. 다행히 유배 가는 도중 뭔 일인지 또 사면이 되는 덕에 공손찬은 고향에 돌아왔지만, 사면되지 못했다면 대단한 의리남아인 공손찬을 삼국지 게임에서 선택 못할 뻔.-_-;; 고향으로 돌아와 그전의 평판 덕에 다시 벼슬길에 오른 공손찬은 그때부터 포텐이 만개하며 당시 유주 인근의 소수민족들 중 가장 세력 크던 "오환족"의 학살자로 이름 얻기 시작하는데...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오환족들의 분노와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그 과정이 실로 잔인했는데, 공손찬은 단순히 '접경지역의 이민족을 축출한다' 이상의.. 몹시 뒤틀린 인종관을 갖고 오환족은 모조리 박멸하여 그 씨를 말려야 한다는 한족중심의 인종차별론자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오환족의 투항은 결코 용납되지 않았으며, 애어른이나 남녀노소없이 오환은 물론, 그 2세나 3세의 혼혈에게조차 가차 없었고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반 후한 백성들의 원성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오환 및 그 일대 소수민족에 대한 홀로코스트는 중화사상에서 비롯된 한족 우월주의가 당연시되던 여타 한족의 입장에서조차 이해를 얻기 힘들만큼 극심했다. 강족들을 토벌하기도 했으나, 그들과 결탁하기도 했던 동탁, 마등, 한수, 마초 등등이나 흑산적 및 오환족들과는 밀당을 통해 견제와 화친을 번갈던 원소나 조조, 무릉만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했던 훗날의 유비 등 아무리 소수민족을 오랑캐 취급하며 천대했던 당시라도 무조건 다 싸잡아 죽인다기보다는 필요시에는 협력대상으로 봤던 경우도 많았거늘... 공손찬은 이들에 대해 철저한 배척 및 멸종을 도모했고 당연히 오환들도 공손찬에 대한 항복 역시 항전의 끝과 다름없는 죽음뿐이란 것을 알고는 최소한 싸우다 죽자는 결론을 택하며 후한 백성들 역시 오환족들의 침략 또는 병사로 차출되는 등의 피해가 나날이 늘어갔다. 심지어 공손찬은 소수민족들과의 전투에서는 앞장서서 무쌍난무를 찍었고 결국 그의 군사적 재능과 이 오환족 제노사이드가 결합하여 후한의 동북부지역은 어쨌건 가장 소수민족의 평탄화가 잘 된 지역이 된다... 종종 연의 내에 등장하던 공손찬의 "백마장사"라는 닉네임과 그에 따른 업적이 이 소수민족 학살로 얻어진 것이다. 결국 어찌보면 단순히 치안을 위해서가 아닌 본인의 가치관에 따른 삐뚤어진 행태의 결과. 이러던 어느 날, 유주자사(쉽게 말해 우리의 도지사 개념)로 한실종친이자 인망 높고 덕이 있기로 소문난 "유우"가 부임해오며 공손찬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지는데... 유우는 군사일변도의 공손찬 플랜에 대해 상당한 회의감을 표출하며 막대한 군비지출을 최소화하고 그 여유분 + 중앙 재정지원을 그간 숱한 전투에 황폐화된 농지개간 및 유랑민들의 정착지원 등의 복지와 지하자원 개발로 인한 산업다각화 및 재정확대, 오환과의 화친 및 교류와 교역의 증대를 통한 경제구조 변혁 등 다분야에 걸쳐 진짜 유주를 위한 각종 계획들을 내세워 추진했는데.. 공손찬은 위에 언급한 자신의 뒤틀린 인종관 + 그런 위기감 조성을 통한 군비확장 및 국방비 사유로 자신의 세력과 야망을 키우던 터에 유우의 저런 정책들은 일절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고 유우와 공손찬은 극심한 갈등을 겪었으며, 공손찬이라면 치를 떨던 오환들도 유우측으로 투항 및 교섭을 시도했다. 이미 드높던 덕망이 이 때 더 높아지며 백성들의 칭송이 줄 이어, 후에 반동탁 전선 측의 맹주인 원소가 그를 새 천자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던 것이다. 그 결과 그런 원소가 주도하던 '반동탁 연합에도 불참'한다. 하여간 이때부터 유우와 공손찬은 거의 각자노선을 걸으며 갈라선다. 이후 공손찬은 잠시 오환족 박멸을 미뤄두고 하북을 휘젓기 시작하는데, 삼국지연의에는 묘사가 안되나 공손찬의 용병술, 군지휘능력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 많은 이들 중 가히 TOP10에 들만한 수준이다. 일단 먼저 말한 오환족 박멸 역시 마찬가지로, 원소나 조조같은 강자들이 오환이나 선비족, 흉노같은 북방 소수민족들을 괜히 회유하고 화친하려 든 게 아니다. 그만큼 버거웠던 부분이 크게 작용했다. 허나 공손찬은 이런 이들을 거의 지워버리다시피 했으며, 191년에는 비록 훈련없는 오합지졸이라고는 하나 무려 30만(삼국지 특유의 뻥이 아닌 역사기록에 의함)의 황건적 잔당이... 현 대한국군의 절반 가량의 저 대병력이 유주에 침공하자, 겨우 고작 2만의 병력만으로 저들을 궤멸에 가깝게 타격한다. 솔직히 저 열 다섯 배의 전력차는 진짜 황건적이 모두 맨손이였어도 버거울 지경이거늘.. 공손찬은 해냈다. 심지어 유우와의 대립이 극에 달에 결국 공손찬의 군사행동에 수시로 겐세이 놓던 유우와 공손찬은 다이를 붙게 되며 이때도 무려 10만이나 되는 병력을 고작 겨우 "100명"만 선발해 지휘부까지 뛰쳐 들어가 와해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렇듯 당시의 공손찬은 원소가 제대로 득세 전까지는 당시 전 중국을 통틀어도 맞상대로 당해낼 재간이 없던 최강의 세력이였다. 공손찬군은 병력 수는 물론, 각종 장비와 물자도 상당히 최신이였으며 유독 기병대에 집착을 했던 공손찬의 고집 때문에 전 중국에서 가장 많고 잘 훈련된 기마군단을 거느리고 있기도 했다. 비록 우리가 알만한 네임드 장수나 모사는 없었으나 공손찬은 오로지 자신의 무력과 지휘력 및 전술능력으로 커버업 하고도 남았으며 기마군단 특유의 기동력을 바탕으로 평야지역이 넓던 유주와 요동 일대의 정복자가 되어 심지어 당시의 원소조차 공손찬의 이름을 들으면 쫄지 않을 수가 없던 상황. 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갖고 서출의 그가 오로지 맨주먹으로 하북을 주름잡으며 소수민족과 한족 통틀어 무적으로 이름을 날려가고 있는 와중에도 서서히 그에게는 그림자가 들고 있었으니...... 1. 과격함. 그의 정복 및 전투방식은 심히 거칠고 잔인했다. 소수민족들 상대로는 항복 or 항전 여부 무관하게 모조리 죽였으며 사로 잡힌 이들은 곱게 죽이지도 않고 온갖 모질고 잔인한 방법을 통해 죽였으며, 그렇다고 관할지내의 백성들에게 선심을 베푼 것도 아니다. 공손찬의 병사들은 유주일대의 그 어떤 도적떼보다 약탈과 겁탈이 잦다고 악명이 떨쳐져 있었다. 2. 몰인정. 그는 부하들에게도, 병사들에게도,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들에게도, 다른 군주들에게도, 당연히 적세력에게도... 오직 자기자신의 욕심과 야망의 성취에 소모되는 도구 또는 그에 방해되는 장애물로만 여겼다. 응당 그런 사람냄새 나지 않는 그에게 인재가 몰릴 리 없고 있는 인재조차 떠나는 경우가 잦았다. 당장 공손찬은 그 부덕함으로 조운, 전예 및 유비 등의 특급인재들을 얻고도 놓친다. 그가 성공가도를 달릴 때야 그렇다셈쳐도 그가 위기를 맞자, 그의 휘하세력들은 이탈에 가속이 붙어 더욱 비참한 몰락을 부채질 하는 계기가 된다. 3. 고집. 그는 말 했듯이 '서자'였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실력, 운으로 성공을 쟁취했는데, 동서고금 막론하고 이런 이들은 자신이 옳고 맞다 여기는 고집이 보통이 아니다. 게다가 그도 모자라 남을 무시하는 경향도 강하고 이런 부류들이 대개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독단적인 아집부리기다. 공손찬 역시 이를 극복하지 못한체, 오로지 모든 부분에 있어서 자신의 고집대로만 처리했다. 역시 이런 이들 아래로는 자신의 뜻과 재주를 펼칠 수 없기에 인재가 모이거나 성장할 수 없다... 4. 별종. 공손찬은 각종 다양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평범한 사람은 아니였음이 여기저기 나타난다. 물론, 삼국지속 영웅들이 응당 평범한 이들이 아님은 맞으나, 공손찬은 좀 희한한 면이 많은 이였다. 유별나던 인종차별적 면모도 그렇거니와, 장인어른의 유배지를 따라가며 굳이 자신의 장례를 스스로 치른 점, 게다가 공손찬은 놀랍게도 참모나 책사에 점술인, 상인, 건축가 등등.. 일절 군사, 행정과 무관해 보이는 이들을 단지 자신과 코드 맞고 복종하며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채용했다.... 저런 여러 큰 결점들 탓에... 그 놀랍고 빛나는 군사적 재능을 토대로 후한의 동북일대를 독차지 하고도 결국 당시로서 자신보다 모로 보나 뒤쳐지고 모자르던 원소와의 대결에서 패하고 만다. 당시 원소는 객관적 전력으로는 공손찬에 댈 바가 아닌 걸 파악했기에 정면승부를 피하고 공손찬의 전력을 싸우지 않고 약화시키는 전법을 쓰는데, 예전 원소의 칼럼에서 말했듯 원소는 정치정략의 고수였는데 이를 십분 활용! 인심을 잃은 공손찬의 영지였던 유주일대를 비롯, 여기저기 사람을 보내 공손찬의 직간접적 세력권이던 요동, 기주 북부일대, 청주와 병주 등에 공손찬에 대한 네거티브적 프로파간다를 퍼뜨린다. 공손찬을 적대시하는 이들 및 세력들을 적극 포섭했으며, 공손찬에게서 전향해 오는 인재들은 더욱 크게 포상했다. 시간이 지나자 공손찬의 세력권에는 그간 공손찬의 폭정 탓에 더욱 그에 대한 비방과 괴담이 날개를 달고 퍼졌으며 공손찬을 따르던 적잖은 이들이 타세력으로 전향 및 하야하는 등 이탈자들이 줄을 이었다. 공손찬세력의 레임덕은 곧 군기강해이로도 이어져 군자금 및 관련 장비나 물자의 횡령도 횡행했으며 일부 장수들은 군마를 빼돌려 파는 일도 생겨났고 병사들도 더욱 백성들을 심히 약탈하게 되었으며 나날이 공손찬의 세력은 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저물어가던 공손찬... 이런 와해작업이 무르익었다 판단한 원소군의 총공세에 공손찬세력은 언제 그리 강했냐는 듯 무너져 내렸으며, 그 강하다는 공손찬군의 기마군단 역시 이에 대한 자부심에 변화없던 전술 탓에.. 대기마군단용 요격전술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 원소군에 의해 박살나고 만다. 세가 기울자 공손찬은 수 많은 백성들을 착취하고 노역에 동원해 지은 최강의 방어요새인 "역경"으로 피신.. 여기에서 짱 박힌 체, 히키코모리처럼 허송세월을 보낸다. 이 부분 또한 실로 안타까운게, 이 역경은 당시의 냉병기로만 무장된 재래전력으로는 사실상 수년 이상의 시간으로도 함락이 쉽지 않은 요새였고, 기세가 꺾여 그럴 뿐 적잖은 병력과 그 병력들이 수 년간 먹을 식량도 비축되어 있었으며 내부에 둔전이 가능할 정도의 농토도 있는 등. 거의 이 역경이란 요새는 당시의 건축토목술의 정점을 찍는 요새로 만화 진격의 거인에 나오는 월마리아같은 거대장벽에 둘러쌓인 궁극의 방어요새였던 것. 아무튼 공손찬은 이 요새에 거북이처럼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않았다. 원소군의 입장에서도 공손찬의 장기전은 반갑지 않았다. 어쨌건 자신의 본거지를 비우고 나온 원정이 길어지면 자신의 거점을 호시탐탐 노리던 조조나 흑산적들의 공격에 취약할 수 밖에 없으며 병참에도 한계가 있고 그렇다고 섣불리 퇴각하다 역경내에서 별 다른 손실없이 진치던 공손찬군이 쏟아져 나오면 그야말로 낭패기 때문. 그런 이유들로 심지어 원소는 오히려 공손찬에게 먼저 화친을 제의하기도 했으나, 싸울 생각도 없었으면서도 공손찬은 제 고집에 화친에는 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대치가 계속 된 와중... 안그래도 희한한 괴짜 공손찬은 정신이상에 가까운 기행을 보이는데, 역경루라는 역경내에서 가장 높은 누각에서 지내던 공손찬은 그 누각에 두터운 철문을 달아 안에서 잠그고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7세 이하의 아이만을 드나들게 하였으며 각종 서류와 공문서들과 식료품과 생필품도 이런 아이들이 셔틀을 맡았고 급한 보고사항은 밖에서 누각으로 소리치면 공손찬의 대답을 다시 누각내의 시종들이 소리쳐 대답하는 심히 박ㄹ혜스러운 행태를 보이기 시작.... 게다가 잠깐 밖으로 군사를 출격시켜 긴 대치에 루즈해있던 원소군을 기습하다 포위 당하자, 어서 구원병을 보내자는 부하들의 요청에, '저들을 구하면 모두 구원병을 믿고 열심히 싸우지 않을거다'라며 그들의 전멸을 방관한다... 이를 계기로 안그래도 저물어 가던 공손찬의 세력은 급속도로 와해되며 탈영병과 이탈자들이 늘어갔고 제 아무리 우주방어요새라도 농성병력이 없다면 함락은 시간문제.... 끝내 원소군이 방어를 뚫고 내부로 진입하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효웅 중의 하나던 공손찬은 가족들을 모두 죽인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원소는 조정에 보고를 올린다는 표면적 이유, 조조에게 경고를 보내려는 내면적 이유로 공손찬의 참수된 머리를 보내는데, 당시의 조조와 조정 대신들 모두 공손찬의 패전을 믿지 못하다 그 잘려진 머리를 보고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훗날, 그런 공손찬을 무찌르고 그의 세력을 흡수하여 하북최강의 대세력으로 거듭난 원소가 훨씬 작고 약한 조조에 의해 몰락을 맞을 때 못지 않게 이 때의 원소가 공손찬을 상대로 승리했음은 전중국 최고의 이슈였다. 이렇듯, 아무리 자신이 뛰어나도 주변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집으로 가득차 왜곡된 가치관을 가진 불통의 인재는 어떤 끝을 보는지를 공손찬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실무에 밝고 행정에 뛰어나며 바른 말이나 쓴소리 하는 전문가들을 배제한 체, 그저 자신과 맞는다는 이유만으로 비전문가들을 비선실세로 삼았던 점. 오로지 자신의 의견과 생각만을 일방통보하며 고집과 불통으로 귀를 닫았던 점. 당시 비록 인구가 많진 않았어도 비교적 타지역에 비해 이른 개발덕에 꽤나 자리 잡히고 안정된 터전을 차지하고도 자신의 부덕으로 이를 황폐화시킨 점. 화친과 교류를 했더라면 충분히 윈윈하고 자신의 세를 더욱 키울 수 있던 상대를 오로지 적으로만 삼아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대립을 했던 점. 자신의 병사들이 적들 틈에 죽어가고 있음에 이를 충분히 구할 수 있었음에도 말같잖은 이유로 방관하여 모두 죽도록 방치한 점. 왜곡된 가치관 탓에 주변의 인심을 잃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그로 인해 적잖이 떠나간 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 사태를 수습해야 할 위기에 홀로 외부와 단절하여 틀어박혀 골든타임을 놓친 점. 수 많은 그의 문제점들이 마치 우리나라의 누군가와 놀랄만치 닮았다. 이렇듯, 자신의 역량과 장점들이 충분히 세상을 자기것으로 만들만 했음에도 이들을 잘못쓰게 되면 그 끝은 비참한 말로뿐이라는 것도.... 누군가와 닮았던 안타까운 영웅 공손찬편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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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 대한 이해도 높이기 5.

지난번 삼.이.높.4에서 중국의 삼국시대 당시 위세를 떨치던 소수민족들에 대해 다루다 분량이 길어지며 일부 민족들을 이월시켰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나머지 썰을 푸는 시간ㅎㅎ 본문에 앞서, 정말 기약없이 다음편이 늦어진 점에 대한 사죄의 말씀을 고개 숙여 전한다는... T-T 생애 가장 바쁜 삶을 살다보니 진정 도저히 시간적, 정신적, 체력적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기에 (-_-;;) 아무튼 그래서 사과는 다시 차차 드리기로 하고 저번에 못 다룬 소수민족들인 선비, 저, 무릉만과 남만에 대해! 그럼 거두절미, 바로 본론 Go Go~~~ 선비(鮮卑) 이름만 들어보면 맨날 진지하고 엄숙한 선비충같은 부류들 같이 느껴지지만 이미 한자부터 다른, 그냥 발음만 같은... 우리가 떠올리는 그 선비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종족들! 지금의 중국 허베이성에서 내이멍구(내몽골) 자치구 일대에 걸쳐 중세시대에 번성했던 '동호'라 일컬어지던 유목민들의 무리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전투민족인 흉노들에게 대대적으로 작살나며 내이멍구 동부의 선비산이라는 산 일대로 쫓겨 정착한 이들이 "선비족"이다. 참고로 오환족들도 저 동호 무리들 중 일부가 '다싱안링산맥'의 한 봉우리인 오환산 일대로 쫓겨가 무리지은데서 이름이 붙은 케이스이므로 선비와 오환은 그 뿌리가 같다는게 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ㅎ 막상 삼국지의 배경인 후한 ~ 삼국시대 ~ 진나라 때까지는 그리 큰 두각을 나타내던 종족들은 아니였다. 일단 무엇보다 흉노에게 여러 차례 발린 적이 있는데다, 중원의 근간인 한족들과 조우하려면 흉노의 영향력이 큰 지역들을 거쳐야 했기에 굳이 천적인 흉노까지 스킵하며 한족들에 겐세이 줄만큼 수나 파워가 강한 애들은 아니였... 그러다 흉노들이 남북으로 갈리며 약화, 여기에 선비들의 거주지역과 한족들의 거주지역 중간에 있던 북흉노들이 위와 진에 털려 위용을 잃으면서부터 두각을 드러내, 진나라도 점점 나가리의 뉘앙스를 풍기자 땅따먹기하러 쏟아져 내려왔고 이때부터 "오호십육국시대"가 개막된다. 결국.. 우리에게 익숙한 삼국지의 본 배경되는 후한에서 삼국시대를 거쳐 진으로 중국이 재통일 될 때까지 별 영향 못 미치고 북동쪽에 처박혀 있던 쭈구리들였던 것. 심지어, 문화적으로도 그닥 특색이 모호했던지라.. 당나라가 들어설 무렵에는 흐지부지 없어진 종족들이다. 덧붙이자면... 흉노나 한족들에게는 쭈구리였던 얘들이지만, 우리측의 부여에게 있어서는 천적과도 같던 이들이였다.. 부여는 내내 이 선비충들에게 시달림을 면치 못하다 고구려가 건국되고도 한동안 시달림이 지속.. 후에 그 대단한 "광개토태왕"이 요동일대에서 갈아마신 후에야 악연을 끊었다. 저(氐) 위에서 언급한 오호십육국시대의 오호 중 하나를 차지할 정도였음에도 그닥 기록이 별로 없는 종족이다. (참고로 오호는 흉노, 선비, 강, 저, 갈) 이들은 위와 촉 사이의 서량의 남서에서 익주의 북서인 무도일대에 자리잡은 종족들이였고 앞서 설명했던 흉노, 선비, 오환 등등이 유목민족들이였던데 반해 이들은 강족처럼 정착민족들이여서 농업과 임업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강족들과 거주지가 인접 또는 겹쳤는데, 강족들이 숫적우위에 더 와일드하다보니 많이 뭍힌 감이 없지 않고, 삼국지연의나 기타 창작물들에서는 그냥 죄다 강족으로 싸잡히는 비애도 있다... 당장 마초 & 한수가 조조를 씹어먹으러 서량의 세력들을 죄다 싹쓸어 올 때 그들의 주력이 강족전사들이라고만 표현되어 있지만 강족과 저족의 비율이 7:3 가량 되어, 저족들의 비중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였음에도 나관중은 그냥 무시하고 다 강족처리 했다. 한편... 기록이 부족하다는건 그만큼 기록자인 한족들 입장에서 별 임팩트를 못 느꼈다는 소리. 사실, 동북쪽의 소수민족들은 넓디 넓은 벌판에서 수 많은 가축 때를 휘몰아 쏘다니며 늘 말을 타고 또 원래 저런 벌판은 물도, 식량도 넉넉치 않으며 대체로 육식위주다보니 아무래도 더 거칠었던 반면... 서쪽의 소수민족들은 그럴 벌판이 없는 산악지형에 거주하며 수렵, 채집생활도 하긴 했으나 역시 식량의 주요루트는 농사였던 관계로 채식비율도 더 높고 식량수급이 아무래도 떠돌이 유목들보다는 나았기에 좀 덜 거칠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저 당시에 "말"이 갖는 기동력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파괴력이 어마무시했기에 대부분 1인 2마 이상인 유목민들이 말보다 농사짓는 소와 더 가까운 산악민족들보다는 공격력이 앞설 수 밖에 없었을거 같다. 현세에 이르러, 우리회사만 봐도... 늘 사무실에 정착해 자기자리에서 농사짓듯 모니터만 보고 밥도 식당밥, 도시락 먹는 내근직들보다는 맨날 이리저리 차 타고 거래처와 클라이언트 찾아 떠돌며 편의점에서 MSG와 나트륨 범벅인 백종원 CU도시락이 주식인 영업직 인간들이 더 거칠고 개새끼들이 많다.. (나도 그 개새끼들 중 한 마리인건 함정) 무릉만(武陵蠻) 삼국지의 자타공인 바퀴벌레 종족들이다.... 삼국시대 당시에 만약 핵전쟁이 났어도 쥐, 바퀴벌레와 함께 절대 멸종 안했을거 같은 한족들 입장에서는 진심 진저리 넌더리 났을 종족들인데, 이들의 포지션을 현대로 옮겨와 보자면 아프가니스탄에서 긴긴시간 우주제일 천조국을 엿 먹인 탈레반과 비슷하고 역시 몇 십년 전 천조국을 학 떼게 만든 베트콩과도 비슷하다. 이름만 봐도 어디 사는지 드러나는 이들은 말 그대로 형주의 "무릉"일대에 퍼져 살았다. 삼국지를 연의나 게임으로만 접한 분들 입장에서는 여태 언급된 소수민족들은 아직 소개안한 남만족과 더불어 거의 중국의 변두리에 살았다지만 무릉만들이 사는 무릉은 중국의 한복판인데 뭔 소수민족??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도 그럴만한게, 중국이 원체 넓고 큰데다 그 넓은 땅이 전부 평야도 아니고 도심지도 아니다. 심지어 지금보다 훨씬 인간 적고, 인프라가 꽝이라 미개척지, 오지가 많던 1,900여 년 전 중국은 말할 거 없어, 당시의 형주는 비교적 인구도 많고 인프라와 교통이 발달한 강릉, 강하, 장사 정도까진 꽤 살기 괜찮은 곳이였지만 무릉은 그냥 완전 험준한 협곡 투성이의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는 오지로서... 여러분들 영화 '아바타' 다들 봤나? 거기의 파랗고 길쭉한 나비족들 사는 판도라와 엇비슷한 그런 환경이였다. 무릉만들의 전술은 바로 저 거지같은 험지의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전"이였고... 이 전술 덕에 한족들의 끊임없는 토벌릴레이 속에서도 종족의 근간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유표는 손 놓고 없는셈치는 땅이였고, 삼국이 정립되어 가는 와중에 오에서 황개, 반준, 여대, 보즐 등등이 수차례 토벌에 성공은 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그냥 겁 주고 주의만 시킨 수준일뿐, 이들의 세력존폐를 위협할 수준의 데미지를 주는데는 실패했다. 쉽게 말해, 그냥 이들로 하여금 지들 영역에서만 짱 박혀 지지고 볶고 알아서 하게 하고 한족의 영역으로 나오지 않게끔 억제만 한 수준이였던 것. 당장 역사를 조금만 더 올라가보면, 이들의 존재는 한족의 애물단지같은 위치였고, 하다하다 안되자, 소수민족 토벌의 달인인 마원(마초의 조상) 까지 고령임에도 출병시킬만큼이였다. 허나 소수민족 상대로 킬 수가 수두룩 하던 그 마원조차도 무릉만들 상대로는 지지부진하다 끝내 전장에서 병사한다. 무릉만들도 순수혈통 단일민족은 아니고 그 일대에 퍼져 사는 여러 종족들을 싸잡아 일컫는 호칭이였는데 무릉만들 중 일부는 식인풍습도 있었던 듯... 뭐... 저걸로도 무릉만들 수준이 어땠는지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해도 된다고 여겨진다. 일반적인 삼국지 매니아분들에게 있어서, 무릉만의 슈퍼스타는 역시 "사마가"인데, 사마가의 등장은 유비가 관, 장 두 아우 사망에 있어 만악의 근원인 오를 정벌하고자 이릉대전을 개전함에, 촉에 협조하는 것으로 나온다. 당시 걸핏하면 자기들 족치려는 오를 극혐하던 무릉만들에게, 승전시에 자치권을 보장하는 것을 조건으로 촉한의 특산물인 최고급 비단을 잔뜩 챙겨 무릉만들을 설득했던 결과였다. 당시, 비단 싸들고 무릉만들과 협상하러 나섰던 촉한의 네고시에이터는 바로 백미 "마량"이였는데... 당시 자치권도 자치권이지만 그건 나중 이야기고 일단 마량을 필두 삼은 촉한의 협상단이 가져간 비단을 본 무릉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였다고 한다. 하긴, 그도 그럴게.. 여러분들도 맨날 동네시장 신발가게에서 아티스나 슈퍼카미트만 사신다가 옆동네에서 에어조던 시리즈별로 다 갖고 오며 도와달라면 눈 뒤집힐 듯. (아티스나 슈퍼카미트 알면 무조건 아재 당첨) 허나, 여러분들도 다 아시다시피 이릉대전에서 촉이 대박살이 나며 따라갔던 무릉만들도 무시 못할 피해를 입었다... 참고로 여느 소수민족들이 그렇듯, 무릉만들도, "We Are The 무릉만!" 이라며 하나로 뭉쳐진 단일세력이 아닌, 여러 크고 작은 부족들의 연합 비슷한 것이였고 여러분들이 아는 사마가는 연의의 표현처럼 무릉만들의 왕이 아니라, 그런 여러 무릉만들의 부족들 중 한 부족을 이끄는 부족장들 중 하나였다. 남만은 분량도 좀 될 것 같고 아무래도 다른 소수민족들에 비해 삼국지 매니아분들이 더욱 궁금해하며 흥미 가지실 것같은 종족이라 차라리 따로 다루는 게 나을 듯 싶다는 생각에 따로 추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너무나 죄송합니다, 독자여러분들.. 제가 연재를 늦게 하는 편이기는 했지만 진짜 이번에는 도가 지나친 수준의 텀이 생기고야 말았네요... T-T 하지만 저 역시 뒹굴고 노느라 연재가 미뤄진 것은 절대 아니였어요. 저도 좋아서, 즐거움과 보람에 시간내서 글 쓰는데 장시간 못 그러니 참 답답했습니다. 그 와중에 재촉없이 묵묵히 기다려주신 분들, 애정과 관심 담아 재촉해주신 분들... 모두 죄송하고 또 고맙습니다. 그 긴시간 동안 연재 없음에도 팔로워는 줄지 않아서 기뻤다는 ㅎㅎ 아무튼 다시 연재에 힘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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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계의 꽃? 영화관 알바 비하인드 스토리

추석 연휴에 가장 바쁜 곳 중 하나는 영화관이 아닐까? 그래서 이번 [알바 후기]는 알바계의 꽃(?)이라고 불리는 영화관 아르바이트로 준비해봤어. 다들 한 번쯤은 영화관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해봤을 거야. 실제로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아르바이트기도 하고. 왜 그럴까? 영화가 좋아서? ‘연애의 장’이라는 소문을 들어서?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만큼 힘든 점도 많아. 그걸 깨닫는 데는 일주일, 아니 하루면 충분해. 첫 출근 날 그만두는 알바생들 여럿 봤거든. 영화관 알바에 환상을 가지고 시작하려는 친구들한테 전해줘. “어서 와^^ ‘리얼’ 서비스직은 처음이지? 참. 주말 근무할 각오는 되어 있어?” 1. 2주 안에 3가지 업무를 모두 클리어하라! 영화관 아르바이트는 3개의 포지션으로 운영돼. 입장할 때 표 검사하는 ‘검표’, 팝콘 파는 ‘매점’, 표 판매하는 ‘매표’. 매일 포지션이 바뀌기 때문에, 세 포지션 모두 능숙한 멀티플레이어가 돼야 하지. 문제는 이 모든 걸 2주 안에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거야. 입사 후 2주 동안은 기존 알바생이 교육을 해줘. 교육 기간이 지나면, 그때부터 단독 근무를 하게 되는데… 멘붕의 연속이지. 짧은 시간에 세 종류의 업무를 모두 완벽히 소화하기는 솔직히 벅차거든. 나도 신입 때는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어. 셋 중 가장 인기가 좋은 곳은 매점! 매표에 비해 할인 제휴 항목 적어서 고객 응대가 간단한 편이거든. 바쁠 때는 엄청 바쁘긴 하지만, 적당히 쉴 시간도 있고. 검표는 혼자 가만히 서 있을 때가 많아. 꿀알바 아니냐고? 하다 보면 가만히 서 있는 게 생각보다 힘들다는 걸 느끼게 돼. 휴대폰도 없고, 잡담을 나눠도 안 되니까. 매표는 불만을 처리하는 인포메이션 역할까지 해야 해서, 수많은 진상 고객을 상대해야 한다는 게 단점이야. 또, 영화관 제휴 할인 종류가 100가지나 돼서(실화냐..?) 외울 게 가장 많은 포지션이야. 2. 고객>매니저>선임>>>>나 영화관은 사업 특성상 ‘서비스’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 그래서 실수에 엄격한 편이야. 특히 고객이 항의라도 하는 날에는 크게 한 소리 듣지. 가끔 내 잘못이 아닌 거로 혼나기도 하고(눈물). 직원들(보통 매니저라고 불러)이 매 순간 서비스 태도를 평가하는 것도 스트레스 중 하나야. 감시¬당하는 기분이랄까? 실제로 CCTV로 알바생들을 감시하는 매니저가 많아. 다리가 아파서 잠깐 기둥에 기대면, 똑바로 서 있으라고 바로 무전이 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먹이 사슬의 끝에 위치한 삶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체험할 수 있을 거야. 고객>매니저>선임>>>>나. 사람은 미어터지지, 일은 어려운데, 선임들한테 물어보면 자기도 바쁘다고 눈치 주지, 고객은 자기 요구 빨리 들어달라고 난리지. 진짜 머릿속이 하얘진다니까. (내 편은 어디에…) 3. 항상 새로운 진상들이 날 기다린다 영화관과 진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지. 가장 흔한 진상은 반말하는 사람들이야. 정말 남녀노소 할 거 없이 말을 놓는다? 부모님 뻘은 물론이고 심지어 중고등학생까지. 아무리 내가 어려 보여도 눈 마주치자마자 ‘경로 둘’ ‘팝콘 하나’ 이런 식으로 반말하면 있던 친절도 없어진다니까? 또, “그냥 좀 해주세요”라는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 원칙적으로 안 되는 일을 막무가내로 해달라고 하는 거지. 계속 안 된다고 해도 똥배짱으로 버티면, 서비스업이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해주는 경우가 있거든. 그래서 그걸 알고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어. 물질적인 보상을 해주지 않으면 절대로 물러나지 않는 거지. 지금까지 들었던 이야기 중에 레전드는… 신분증을 안 들고 온 20대라고, 주장하는, 미성년자 커플.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라서 입장이 불가하다고 했더니, 샀던 핫도그랑 물을 그대로 알바생한테 던졌다고. (부들부들) 4. 영화 하나는 맘껏 볼 수 있다 수많은 진상들의 공격에도 영화관 아르바이트 인기가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알바생 혜택이 꽤 빵빵하기 때문이야. 일단 영화를 원 없이 볼 수 있어. 물론 공짜로! 매점도 싸게 이용할 수 있고. 퇴근 후에 같이 근무한 친구들이랑 매점 털어서 영화 하나 딱 보면! 그날의 피로가 싹 잊히지. (그만두고 나서 한동안은 영화 보는 돈이랑 팝콘 사는 돈이 세상 아깝게 느껴지더라) 또 검표 포지션에서 일하면 현재 상영하는 모든 영화의 줄거리를 꿰뚫게 돼. 특히 영화의 시작과 끝은 무조건 보니까 대사까지 외울 지경이야. 참, 스포일러 싫어하는 친구들은 강제로 결말을 알게 된다고 짜증 내기도 하더라. 5. 또래 친구들과 일하고 싶다면 최적의 장소 영화관 아르바이트의 가장 큰 장점은 또래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거야. 지점, 시기마다 차이는 있지만, 최소 6-7명이서 같은 타임에 들어가거든. 서로 나이가 비슷하다 보니까 금방 친해져. 같이 퇴근하는 사람들끼리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술도 먹고. 일하는 중간 중간에 장난치고. 이러니 썸이 생겨 안 생겨? 안 생겨요. 꼭 이성적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인맥 쌓기에 좋은 아르바이트야. 알바생이 많으니까 스케줄 조정도 쉬운 편이야. 근무시간을 서로 바꿀 수 있거든. 그래서 학교 다니면서도 큰 무리 없이 일할 수 있어. 6. “감사합니다” 한마디가 알바생을 힘나게 합니다ㅠㅠ 고객 응대가 끝나고 마지막에 “즐거운 관람 되세요” 라고 인사하면 대답 없이 휙 가버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잖아. 아주 가끔 인사를 받아주시는 분들이 있는데,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을 정도로 큰 힘이 돼. 그래서 영화관 아르바이트 시작한 뒤로는, 어딜 가든 “감사합니다”라고 한 마디씩 해주곤 했어. 그 말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아니까. 7. 정리 정리하자면,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진상들을 견뎌낼 수 있는 강철멘탈은 필수조건. 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주말과 공휴일은 내 것이 아니게 된다. 영화관은 그때가 가장 바쁘니까. 대신 영화를 실컷 볼 수 있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다! 많은 또래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면 추천하는 아르바이트다. director 김혜원 illustrator 이정민 대학내일 송영임 에디터  [대학내일] 20대 라이프 가이드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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