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족보를 찾습니다/북에계신 가족도 찾습니다등록일 2015-10-20 23:57
전주이씨 족보 찾습니다. 청권사, 4년 만에 문경으로 유적지순례 떠나 청권사(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종회)가 유적지순례를 통해 조상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고 종친 간의 화합과 우애를 다졌다. 청권사(이사장 이정일)가 6월 16~17일, 이틀간 경북 문경으로 유적지순례를 다녀왔다. 이번 행사에는 이정일 청권사 이사장을 비롯해 자문위원, 임원, 대의원, 6자파 종회장, 전례위원, 문화위원, 효령문화원 임원 등 200여 명이 참가했다. 청권사의 유적지순례는 3년에 한 번 진행한다. 유적지순례는 이사장이 선출된 지난해에 했어야 하는데, 코로나19로 인해 1년 미뤄졌다. 순례단은 효령대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오태영당, 효령대군 8대손인 활재 이구 선생의 위패가 있는 근암서원, 효령대군의 18대손으로 대한제국시대 의병장으로 활약한 운강 이강년 선생의 기념관과 유적지인 개바위와 고모산성을 둘러봤다. 개바위는 이강년 선생이 안동관찰사 등 친일부일배(親日附日輩) 3명을 처단한 곳이며, 고모산성은 이강년 선생이 1896년 방어진지를 구축,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했던 곳이다 이와 함께 순례단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당시 하숙했던 청운각, 최근 방영했던 TV 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세트장과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1위로 뽑힌 문경새재 등 문경의 관광지를 방문했다. 오태영당에는 원래 효령대군의 신주가 모셔져 있었는데. 신주가 청권사로 옮겨지면서 오태영당에 영정을 대신 모시게 됐다. 오태영당은 최근 보수하여 단정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활재 이구 선생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행동이 곧았고 성장하면서는 단정하고 엄정하여 학자의 기품과 도량을 쌓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대왕이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자 이구 선생은 가솔을 거느리고 문경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했다. 운강 이강년 선생은 1896년 을미의병 때 문경에서 의기(意氣)를 들었고 13년간 의병항쟁을 주도하다가 1908년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피체되어 그해 10월 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이강년 선생에게는 1962년, 건국공로훈장 가운데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이정일 청권사 이사장은 “효령대군의 삶과 철학을 우리 종원들만 가질 게 아니라 국민과 함께 할 것을 여러 번 이야기한 적이 있다”며 “이런 토대 위에 효령문화원이 출범했다. 여러 종원의 자발적인 봉사와 협조를 당부드리며 이번 행사를 통해 힐링하고 화합하는 종회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수언 효령문화원장은 “청권사는 타종친회 보다 모범적이고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효령대군께 받은 은덕을 어떻게 갚을 것인지 고찰해봐야 한다”며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대군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찾아내어 ‘대하드라마 효령대군’을 제작할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종친 회원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효령대군은 조선 3대 왕인 태종대왕과 여흥 민씨인 원경왕후의 둘째 왕자로 1396년(태조5)에 태어났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며 온화문명하고 효제충신(孝悌忠臣)의 자질을 갖추었고, 글 읽기를 좋아하고 무예에도 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효령대군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왕(태종대왕)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아우인 충녕대군(세종대왕)에게 성덕이 있음을 알고 학문과 재덕을 숨기면서 왕위를 겸손하게 사양했다. 청권사는 효령대군을 모시는 사당의 이름이고, 종친회 명칭이며, 또한 효령대군의 위덕과 사상을 계승·선양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하려는 사단법인의 명칭이다. 청권사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 효령로에 위치한다. ‘청권(淸權)’은 옛날 중국 주(周)나라의 우중 왕자가 아버지 태왕의 뜻을 헤아려 아우에게 왕위를 양보한 미덕을 칭찬하면서 공자가 청권이라고 한데서 유래한다. 효령대군은 아버지 태종대왕의 의중을 헤아려 아우인 충녕대군(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했고, 그 미덕을 세종대왕은 나의 형이 곧 청권이라고 칭송했고, 정조대왕은 효령대군의 사당을 청권사로 사액(賜額)했다. 운강 이강년 선생은 1896년 고모산성에 방어진지를 구축,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했던 곳이다. 저작권자 © 시니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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