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분 특징 - gogulyeo gobun teugjing

고구려의 고분은 고구려의 영토에서 해당 시대에 만들어진 고분을 말한다.

고구려에서는 1만기가 넘는 많은 수의 고분이 만들어졌다. 무덤의 양식은 초기 돌무지 무덤(적석총)에서 돌방무덤(석실총)으로 바뀌었으며, 주로 압록강 주변과 대동강 주변에 분포한다.

고분군[편집]

이들 고분은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현재까지 알려진 고분군과 대표적인 고분은 다음과 같다.

집안·환인 지역[편집]

환인은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2세기 고구려의 도읍으로 추정된다.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渾江) 유역에 위치한다. 집안은 이후의 도읍이다. 1907년 프랑스 고고학자 샤반느(E.Chavannes)가 처음 벽화를 발견하였고, 이후 일본과 중국의 학자들에 의해 여러 고분에서 벽화가 보고되었다.

  • 하해방 고분군
모두루총 외
  • 우산하 고분군
각저총, 무용총, 삼실총, 통구사신총 외
  • 산성하 고분군
미인총, 산성자귀갑총 외
  • 만보정 고분군
  • 마선구 고분군
  • 장천 고분군
장천1호분, 장천2호분 외
  • 환인군

평양·안악 지역[편집]

평양은 고구려의 후기 도읍지이다. 5세기 이후의 시기에 해당된다.

평양군
  • 순천
  • 평원
  • 대동
  • 평양
개마총, 호남리사신총, 진파리1호분
  • 남포
수렵총, 쌍영총, 수산리벽화분, 강서대묘, 강서중묘, 덕흥리벽화분, 약수리벽화분
  • 온천
안악군

벽화고분의 변천[편집]

고구려의 토총은 벽화를 가진 것과 안 가진 것의 두 가지로 나뉜다. 벽화를 가진 이른바 벽화고분의 변천은 3기로 나누어 개관하는 것이 보통이다.

제1기는 대략 5세기에 해당되며 중국의 한(漢)·삼국(三國) 및 낙랑의 옛터에 있는 중국계 벽화고분의 자극을 받아 일어난 중국 묘의 모방형식이며, 전실 좌우에 측실(별실)이나 감(龕)이 달려서 그 폭이 주실보다 넓어지고 평면이 T자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와 같은 유의 제1기 고분으로서는 평안남도 강서(江西)의 연화총(蓮花塚), 순천(順天)의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통구의 삼실총(三室塚)은 천장이 점차로 내경(內傾)하여 좁아지는 낙랑전분식(樂浪塼墳式) 단실묘이며 용강(龍岡) 매산리(梅山里)의 사신총(四神塚)도 단실묘이지만, 천장이 말각조정으로 되어 있다. 해방 후에 발견된 [안악 3호분이나 요동성총(僚東城塚)도 제1기 고분으로서 특수한 중국식 분묘의 구조를 보인다.

제2기의 벽화고분은 고구려 성기(盛期)에 해당하는 6세기 전반에 축조되었으며, 1기에서와 같이 통구와 용강지방에 비슷한 분포를 가지고 있다. 구조면에서는 전실에서 측실이 없어지고 따라서 정면 폭이 주실과 같고 명실상부한 부실로서의 전실이 된다. 통구의 쌍실총(雙室塚)·무용총·각저총·귀갑총(龜甲塚), 평양지방의 쌍영총·성총(星塚)·부부총(夫婦塚)·개마총(鎧馬塚) 등은 모두 2기 고분군에 속한다.

제3기는 6세기 후반경부터 7세기 전반에 걸치는데 전실이 없는 단실이 유행하며, 종래의 돌덩이(碑石)로 축성하고 표면에 회칠을 한 형식 외에 장군총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큼직한 화강암을 쓰거나 마연(磨硏)된 편마암 판석을 써서 방형의 석실을 만들고 그 표면에 직접 벽화를 그린 형식이 섞이고 있다. 3기 고분의 예로는 통구의 사신총(四神塚), 서강(西崗) 17호분, 우현리의 삼묘(三墓), 대동군 호남리(湖南里)의 사신총, 중화군(中和郡) 진파리(眞坡里) 1호분과 동 4호분 등인데 대체로 평양부근에 집중되어 있다.[1]

각주[편집]

  1.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벽화고분의 변천〉

참고 문헌[편집]

  •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사계절, 2000[쪽 번호 필요]

외부 링크[편집]

  • 고구려 고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고구려 고분, 《브리태니커백과》
  • 최무장, 고구려 도성(都城), 《기호일보》, 2008.4.21. 2008.4.28.

<롯데월드 민속박물관(서울 송파구)>   

“아버님께서는 살아계실 때 사냥을 좋아하셨소. 젊으셨을 때 친구분들과 어울려 사냥하시던 모습을 무덤 안 벽화에 그려 주시오.”

“예. 돌아가신 옛 어르신이 평소 즐기시던 것들을 그리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돌아가신 뒤의 세계에서 누리실 것들도 그리도록 하지요.”

고구려 옛 무덤 안에는 평소 그들의 생활 모습과 생각을 표현한 다양한 벽화가 있어요. 고구려 사람들은 왜 무덤 안에 많은 그림을 그렸을까요?

고구려, 고분 벽화를 남기다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는 죽은 사람의 시신을 보호하고 넋을 기리기 위해 무덤을 만들었어요. 무덤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고, 나라마다 형태가 다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구덩이 내부 둘레에 돌벽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놓는 돌덧널무덤, 기둥돌에 덮개돌을 얹은 고인돌, 항아리 두 개를 이어 만든 독무덤 등 다양한 무덤들이 만들어졌지요.

삼국 시대에 이르러 고구려에서는 돌을 쌓아 놓은 돌무지무덤을 만들었어요. 그러다가 점차 돌로 만든 방이 있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뀌어갔어요. 이러한 굴식 돌방무덤은 주로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이었는데, 이곳의 벽과 천장에 그림이 있어요.

이처럼 무덤 안의 벽과 천장에 그림을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무덤 안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 목적 외에도 무덤의 주인이 살아있을 때 기억하고 싶어 했던 모습을 그렸다고 할 수 있어요. 또한 무덤의 주인이 죽은 뒤의 세계에서도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요. 이와 같은 그림을 옛 무덤의 벽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의미에서, 옛 고(古), 무덤 분(墳)자를 써서 고분 벽화라고 하지요.

앞의 무덤 그림은 고구려의 굴식 돌방무덤 가운데 하나에요. 그림에서 보듯이 무덤 입구와 돌방 사이에 굴처럼 된 널길(통로)이 있어요. 이러한 널길이나 이음길은 물론 돌방의 벽과 천장의 벽에는 다양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지요. 이 그림을 통해 고구려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고, 어디에서 살았으며, 무엇을 먹었는지 알 수 있어요. 물론 고구려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벽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답니다.

그러면 고구려 무덤에만 벽화가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아요. 오래된 외국의 여러 무덤에서도 벽화가 발견되었어요. 그러나 외국의 경우, 마른 벽에 그냥 그림을 그리거나, 회(석회)를 칠한 후 완전히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색을 칠한 것이 대부분이에요.

그런데 고구려 벽화는 외국 벽화와 다른 점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벽에 회(석회)를 바르고 완전히 마른 다음에 색칠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에요. 그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마른 다음에 색을 칠하면 물감의 흡수가 잘 되고 색감도 좋아질 뿐만 아니라, 갈라짐이 적어서 더 오래 보관할 수 있어요.

고구려 후기에는 벽면에 직접 물감을 찍어누르는 방법을 사용했어요. 이 점이 바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생생하게 벽화를 감상할 수 있는 비결이지요. 이와 같이 뛰어난 색감과 완성도를 자랑하는 고구려 고분 벽화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2004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어요.

자, 이제 본격적으로 고구려 고분 벽화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고, 고분 벽화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어떠했는지 살펴볼까요?

고구려에서 유행했던 무늬를 알려줄까? 무용총 무용도

중국 지린성 지안시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국내성이 있던 곳이에요. 이곳에는 수많은 고구려 고분이 남아 있는데, 현재 벽화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고분이 30여기가 되요. 이들 중에 무용총이 있어요. 무용총이란 무용하는 그림, 즉 무용도가 그려진 무덤(무덤 ‘총’)이라는 뜻이지요. 검은색 점무늬 옷을 입은 다섯 명의 무용수가 그려져 있는 무용도를 자세히 살펴볼까요? 춤을 추고 있는 무용수의 모습에서 고구려 사람들의 우아한 자태가 느껴지지 않나요?

<무용총 무용도(중국 지린성 지안)>   
한국콘텐츠진흥원

훤칠한 키에 갸름한 얼굴, 매끈한 옷맵시가 산뜻해 보이네요. 아마 당시에는 물방울 점무늬 패션이 유행한 것 같아요. 무용단 아래에서는 7인조 합창단이 노래를 부르고 있네요. 그런데, 뒤를 돌아보며 딴청을 피우는 듯한 왼쪽에서 세 번째 합창단원이 눈에 띄네요. 저 시대에도 말 안 듣고 딴 짓하는 사람이 있었나 봐요.

고구려 사람들의 기상을 느껴 볼래? 무용총 수렵도

<무용총 수렵도(중국 지린성 지안)>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 무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사냥 하는 모습이 그려진 이 그림은 무엇일까요? 무용총의 돌방에 그려져 있는 또 다른 벽화인데, 사냥하는 그림이라고 해서 수렵도라고 불려요. 그림을 다시 한 번 살펴보세요! 말 타고 질주하면서 앞을 향해, 또 몸을 돌려 활시위를 잔뜩 당긴 고구려 무사의 모습이 보이죠? 또 그 모습에 깜짝 놀라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 호랑이와 사슴도 보이네요.

고구려 사람들의 사냥 모습에서 그들의 민첩하고 활달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나요? 말을 타고 사냥하는 고구려 무사보다 산이 작게 그려진 것은 아마도 종횡무진 달리며 산을 마음껏 누빌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지 않을까요? 주인 무사 옆에서 사냥을 돕는 개의 모습도 실감나게 그렸어요.

고구려를 세운 주몽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 사람들은 활을 아주 잘 쏘았다는 기록이 전해져요. 평소에도 활쏘기와 사냥을 통해 무예를 단련했기 때문에 죽은 뒤에도 무덤 안에 사냥하는 모습을 그렸겠죠?

고구려의 음식 문화를 알려 줄까? 안악 3호분의 부엌 그림

<안악 3호분 벽화 중 부엌(황해도 안악)>   
동북아역사재단

분주하게 식사를 준비하는 부엌의 모습이 그려진 이 그림은 무엇일까요? 고구려 세 번째 수도였던 평양 아래쪽에 위치한 황해도 안악 지역에 있는 안악 3호분의 부엌 그림이에요.

이 벽화를 보면 고구려 귀족이 살고 있는 집의 부엌이 어떤 구조를 갖고 있는지, 또 고구려 사람들은 무엇을 즐겨 먹었는지 알 수 있어요. 위 벽화를 보면 부뚜막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불을 지피는 여인이 보이죠? 또 둥근 모양의 시루 앞에 서서 국을 끓이는 여인도 보이고, 옆에서 부지런히 상을 차리는 여인도 있네요. 부엌 앞에서 두 마리의 개가 뭐 먹을 것이 없나 하는 표정으로 어슬렁거리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어요.

부엌 뒤에 있는 고기 창고에는 여러 종류의 고기가 통째로 갈고리 줄에 걸려 있어요. 마치 오늘날의 동네 정육점 같네요. 집 안에 고기 창고가 있을 정도면 아마도 신분이 높은 귀족의 집이겠죠? 부엌과 고기 창고의 지붕을 보니 고구려 귀족들은 기와집에서 살았나 봐요. 이 벽화를 통해 고구려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어요. 고구려 사람들은 잡곡 외에도 집에서 기르는 가축도 먹고, 사냥을 통해 잡은 짐승들도 먹었어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고구려에서 유행한 도교(강서대묘의 사신도)

삼국 시대에는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자연을 숭배하고 늙지 않고 오래오래 사는 것을 추구한 종교인 도교가 널리 전파되었어요. 도교를 믿는 사람들은 도교가 이루고자 했던 이상적인 세계를 예술로 표현하면서 여기에 죽은 뒤에 다가올 세계에 대한 믿음을 담기도 하였지요. 고구려 사람들 중에도 도교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나면서 그들의 믿음을 무덤에 표현했어요.

그래서 무덤의 주인공을 지켜주려는 마음을 담아 동쪽 벽에는 푸른색의 청룡, 서쪽 벽에는 흰 털을 가진 백호, 남쪽 벽에는 봉황을 닮은 주작, 북쪽 벽에는 뱀과 거북을 합친 모습의 현무를 그렸어요. 이 그림을 사신도라고 해요. 물론 사신도의 청룡, 백호, 주작, 현무는 실제 존재하는 동물이 아니라 상상 속의 동물들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에요.

평안남도 강서군에 있는 강서대묘의 사신도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 사람들 중에는 사후 세계와 도교를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그들의 생각이 궁금한가요? 그러면 고구려 고분 벽화를 살펴보세요. 무덤 속 벽과 천장에 그려진 생생한 그림들이 여러분의 질문에 바로 답해 줄 거예요.

<강서대묘의 사신도(평안남도 강서)>   
동북아역사재단

[집필자] 방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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