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78호 - geumdongmileugbosalbangasayusang 78ho

국립중앙박물관 5월까지 보존처리…보관, 발받침도 접합

지난 2015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에 나온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삼국시대 불상인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수술대에 오른다.

10일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5월 31일까지 제78호 반가사유상의 보관(寶冠)과 오른쪽 어깨 부분, 왼쪽 발받침의 균열을 접합하고 보강하는 보존처리가 이뤄진다.

현재 이 불상은 보관의 오른쪽과 오른쪽 어깨 끝 부분의 일부가 탈락하고 금이 가 있는 상태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는 먼저 유물의 상태를 점검한 뒤 표면의 부식물과 먼지를 제거하고 보존처리에 돌입할 예정이다.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 오른쪽 어깨 부분의 균열과 결실. [문화재청 제공]

앞서 이 불상은 10년 전인 2007년에도 옷자락 아래쪽을 복원하고 접합하는 보존처리를 거친 바 있다.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은 6세기 후반에 제작된 80㎝ 높이의 불상이다. 은은한 미소를 띤 표정, 자연스러운 반가부좌 자세, 불상이 몸에 걸치고 있는 천의(天衣)의 율동적인 흐름 등이 특징이다.

이 불상은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을 통해 일본 나라(奈良) 현 주구지(中宮寺)의 7세기 목조 반가사유상과 대면하기도 했다. 이는 한일 양국의 대형 반가사유상이 처음으로 한자리에서 공개된 전시였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불상의 상태가 심각하지는 않고 예방적 차원에서 보존처리를 하는 것"이라며 "문화재위원의 자문을 거쳐 신중하게 작업을 하겠다"고 말했다.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 보관과 왼쪽 발받침 부분 균열. [문화재청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이영훈 관장이 지난해 5월23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일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展 개막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2016.5.23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7/03/10 07:30 송고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국보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하 반가사유상)은 2기가 있다. 2기의 반가사유상 중 먼저 국보 제78호가 된 것이 오늘 소개하는 반가사유상이고 뒤이어 국보 제83호가 된 반가사유상이 있는데, 세상에는 국보 제83호가 더 많이 알려져있다. 이 2기의 반가사유상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실에서 함께 볼 수 있다.  반가사유상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불상만큼 조형감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것이 정론이다. 이러한 반사사유상의 조성시기는 주로 6∼7세기로 보고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의자에 걸터앉아 오른쪽 다리를 왼쪽무릎 위에 걸치고, 왼손으로 오른쪽 발목을 감싸고 있으며, 오른손은 오른발 무릎 위에 받치고 손가락 2개를 펴 얼굴 볼에 대고 있는데, 얼굴은 부드럽고 둥글며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있으며 눈은 가늘게 뜬채 발 아래를 응시하고 있다. 그 모습으로 반가사유상을 만든 까닭은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이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하여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 반가사유상은 용광로에 청동을 녹여서 미리 만든 조형틀에 부어 만들었는데, 머리부분과 몸통부분은 별도로 주조하여 만든 뒤, 두부분을 용접으로 붙여서 만들었음이 문화재청에서 조사한 방사선 투과조사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2덩어리로 별도로 만든 부분을 용접하여 붙힌 모습을 살펴보면, 육안으로 보기에는 거의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이음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정교함을 알 수 있다.

지금의 기술로도 이 정도로 완벽하게 붙여서 만들기는 어렵다. 그만큼 600년대 조상들의 용접기술이 뛰어났다. 반가사유상은 전체적인 모습이 매우 균형잡혀 안정된 모습으로, 불전의 조성된 다른 불보살상들이 거의 다 대칭적인 것과는 달리 비대칭으로 만들었는데, 비대칭이면서도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동적이면서도 훨씬 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세를 사람이 직접 의자에 앉아 팔을 괴어 무릎 위에 걸치고 얼굴에 손까락을 대보면 실제로는 매우 어렵고도 어색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처럼 반가사유상의 자세는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국보 제78호인 반가사유상은 조형적으로나 인체의 비례감으로 볼 때 전혀 어색하지 않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몸을 감싸고 있는 주름진 옷은 몸의 형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어깨를 감싸고 있는 부분에서 밖으로 휘어져 올라간 모습을 보면 깃털같은 옷을 입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미륵보살이 입고 있는 옷이 사람이 입고 다니는 옷이 아니라 천상계 불보살이 입고있는 천의무봉의 날개옷임을 뜻하는 것이다. 

특징적인 모습은 독특한 모양의 탑형 보관 모습이다.  보관에는 태양, 초승달 등을 나타내는 것이 있으며  다양한 모양의 장식이 함께 어우러진 형상이 있는데  이런 종류의 반가사유상은 중국의 북위(386~534)양식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북위를 포함한 중국의 어느시대 어느 곳에서도 한국의 반가사유상처럼 아름다운 모습은 볼 수 없다. 

그런데 이 반가사유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곡절이 있었다. 1912년 무렵 한국 문화재에 관심이 있던 한 일본인이 안동지역에서 입수한 뒤 그가 이를 조선총독부에 기증하였고, 또 다시 일본인 학자들이 191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다가 광복되어 한국에 남게 된 것이다. 

 국보 제78호인 반가사유상은 안동지역 곧 옛 신라지역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여 신라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이 그러한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삼국 불교신앙의 발달로 보았을 때 신라 보다는 백제가 더욱 더 왕성한 미륵신앙이 있었으며, 불교학적으로나 건축 또는 미술사적으로도 신라보다는 백제지역이 더 발달하였기 때문에 백제불로 보는 것이다.

특히  백제시대 미륵신앙이 크게 발전했음은 당시에 크게 번창했던 익산 미륵사, 김제 금산사, 보은 법주사 등이 있음으로 알 수 있으며, 그런 관점에서 기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오늘 보는 국보 제78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은 신라작품이 아닌 백제작품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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